◎ 의학자가 미술관에 간 까닭은?
진료실에서 보내는 시간 다음으로 미술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의사가 있다. 그는 오늘도 흰 가운을 벗고 병원을 나와 미술관으로 향한다. 그가 미술관에 간 까닭은 무엇일까?
상반된 분야처럼 느껴지는 의학과 미술은 ‘인간’이라는 커다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의학과 미술의 중심에는 생로병사를 겪는 인간이 있다. 고야의 〈디프테리아〉처럼 질병에 신음하는 인간의 모습을 생생히 묘사한 그림이 있는가 하면, 푸젤리의 〈악몽〉처럼 인간의 정신세계 가장 밑바닥에 있는 무의식을 탐사하는 그림이 있다. 얀 반 에이크의 〈참사위원 요리스 반 데르 파엘레와 함께 있는 성모자〉는 CT 스캐너 같은 최첨단 의료 장비보다 병세를 더 상세하게 투영한다.
의학자에게 있어 미술은 신체와 정신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즉 건강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인간의 기록’이다. 캔버스에 청진기를 대고 귀 기울이면 삶과 죽음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인간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 청진기를 대고 명화와 의학의 숨결을 듣다!
생로병사는 모든 인간이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삶의 궤적’이다. 한 인물의 삶의 궤적을 몇 점의 명화를 통해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1821년 사망한 나폴레옹은 ‘독살설’, ‘비소중독설’ 등 사인(死因)을 둘러싸고 음모론이 끊이지 않는 인물이다. 나폴레옹 사인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 열쇠가 미술관에 있다.
시간차를 두고 나폴레옹을 그린 세 점의 명화는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의 생로병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다비드가 그린 〈튈르리궁전 서재에 있는 나폴레옹〉에서는 나폴레옹에게 찾아온 위암의 전조 증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림 속 나폴레옹은 조끼 단추를 몇 개 푼 다음 오른손을 조끼에 집어넣고 있다. 나폴레옹을 그린 다른 화가의 작품에서도 빈번히 등장하는 이 포즈는 명치 부위에 발생한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 취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된 지 6년 뒤 영욕이 교차했던 생을 마감했다. 나폴레옹의 마지막 모습을 그린 베르네의 〈임종을 맞는 나폴레옹〉도 ‘위암’이라는 사인에 힘을 실어준다. 그림 속 나폴레옹은 앙상하게 말라 있다. 유배되기 몇 달 전을 묘사한 들라로슈의 〈퐁텐블로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속 배가 불룩 나왔던 모습과 매우 대조적이다. 위암은 체중 감소, 식욕 부진, 지방 조직 및 근육 쇠퇴 등의 증상을 동반한다(90쪽).
◎ 의학의 눈으로 명화를 보면 그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길이 열린다!
의학자에게 미술관은 진료실이며, 캔버스 속 인물들은 진료실을 찾은 환자와 다름없다. 그림 속 인물들은 질병에 몸과 마음을 잠식당해 괴로워하고, 삶의 유한성에 탄식한다. 그러다가도 질병과 당당히 맞서 승리하기도 한다. 그들의 고백은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담고 있기에,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이야기다.
카라바조가 그린 〈병든 바쿠스〉 속 바쿠스는 한눈에도 매우 아파 보인다. 생기로 빛나야 할 젊은 바쿠스의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은 허옇게 떠 있다. 그의 눈을 보니 흰자위가 노란빛을 띤다. 간염에 걸린 환자에게 볼 수 있는 황달 증상이다. 빌리루빈은 간에서 죽은 적혈구를 분해할 때 생성되는 노란색 색소로, 간에서 죽은 적혈구와 함께 담즙으로 배설된다. 하지만 간에 병이 있으면 빌리루빈이 배출되지 않아 황달 증상이 나타난다. 〈병든 바쿠스〉는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술로 끼니를 때우다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간염에 걸린, 카라바조의 자화상이다(224쪽).
한 사내가 거대한 하늘을 힘겹게 떠받치고 있는 그림이 있다. 그는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하늘을 떠받치는 형벌을 받는 아틀라스다. 사전트의 〈아틀라스와 헤스페리데스〉는 그리스로마신화의 한 장면을 그렸지만, 의학자의 눈에는 우리 몸을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과 다름없다. 척추뼈 가장 꼭대기에서 4~7kg, 그러니까 수박 한 통보다 무거운 머리를 떠받치는 뼈(제1 목뼈)의 이름이 ‘아틀라스’이다. 현대인에게 있어 아틀라스가 떠받치고 있는 하늘은 스마트폰 같은 디지털 기기들이다. 24시간 손에서 놓지 못하는 디지털 기기들 때문에 우리 몸속 아틀라스는 거북이 목처럼 변형되고 있다(400쪽).
주둥이가 짧은 커피포트를 거친 붓 터치로 그린 그림이 있다. 커다란 몸통에 가늘고 짧은 다리가 달린 커피포트의 형상이 기이하게 느껴진다. 〈커피포트〉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정물화가 아니다. “나의 몸은 주둥이가 너무 큰 커피포트처럼 생겼다네”라고 자신의 장애를 재치 있게 표현할 줄 알았던 한 남자의 자화상이다. 유전병으로 성장이 멈춘 짧은 다리와 그에 걸맞지 않게 큰 머리와 통통한 몸, 로트레크는 커피포트의 모습을 빌려 캔버스에 자신을 그렸다(198쪽).
◎ 문명을 괴멸시킨 전염병부터 마음속 생채기까지
진료실 밖에서 만난 명화 속 의학 이야기
이중섭은 디프테리아로 아들을 잃고 잠을 자다 벌떡 일어나 그림을 한 점 그렸다. 구상 시인이 그림에 관해 묻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기 천국 가는 길이 심심하지 말라고 친구들을 그려 넣었어. 배고프지 말라고 복숭아도 그려 넣었고.” 이중섭은 작은 나무 관에 아들의 시신과 그림을 함께 넣고 묻어주었다(106쪽). 선천성 골계통질환인 ‘농축이골증’을 앓았던 로트레크는 “내 다리가 조금만 길었더라면 난 결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거야”라고 이야기했다(211쪽). 화가에게 찾아온 질병과 그들이 목격한 질병에 신음하는 인간의 모습은 ‘붓’이 되어 수많은 명작의 산파 역할을 했다.
페스트, 스페인독감 같은 치명적 전염병은 문명의 쇠퇴와 몰락을 부추기며 인류 역사를 바꿔놓았다. 전염병이 휩쓸고 간 처참한 세상의 모습은 어떤 의학 자료보다도 생생하게 캔버스에 재현됐다. 간염, 통풍, 내반족, 메데이아 콤플렉스처럼 오래전 그림에 담긴 몇몇 질병은 현재에도 여전히 위협적이다. 이 책은 명화를 통해 인류에게 재앙과 같았던 치명적인 전염병부터 외과의사의 출현, 항생제와 백신의 개발, 정신분석학의 탄생, 초음파와 같은 첨단 의료 장비의 등장 등 의학의 주요 분기점들을 친절히 설명한다.
◎ 의대 다중미니면접(MMI)ㆍ자소서ㆍ의학논술 대비 필독서
의대 입시에서는 지원자의 학업능력뿐 아니라 의사로서 필요한 비인지적 자질을 다각도로 평가한다. 대표적인 평가 방식이 공감력, 의사소통 능력, 상황 판단력을 평가하는 ‘다중미니면접(MMI, Multiple Mini Interview)’이다. MMI는 지원자들에게 의료 현장에서 마주할 수 있는 다양한 선택적 상황을 제시하고, 어떻게 대처할지를 묻는다. 생활기록부(생기부)에 기록된 독서 활동 역시 의대 입시에서 매우 중요한데, 공감력과 의사소통 능력 등 의사로서 필요한 자질이 문해력과 비례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초판이 출간되고 7년여 동안 의학계 및 교육계 전문가가 『미술관에 간 의학자』를 MMIㆍ자소서ㆍ의학논술 대비 등 ‘의대 입시 필독서’ 맨 앞줄에 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의학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학문이다. 의학의 대상이 질병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환자와 소통하고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공감력이야말로,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전염병부터 마음속 생채기까지 화가가 예민한 감수성으로 포착한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공감력을 기르는 좋은 훈련이다. 또한 의학과 의사의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이 책은 의료인에게 필요한 덕목을 함양할 수 있는 훌륭한 교재다.
서울대 자소서를 쓸 때 생명과학과 예술을 융합한 이 책으로 전공적합성을 어필했다. _ 김**(서울대 의예과 19학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