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시작된 여름 소낙비 아래
쏴 하고 쏟아지는 자연의 감각
과감함이 돋보이는 원색들과 단순함을 추구하는 천진난만한 그림체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 온 로랑 모로가 역대급 신작을 들고 돌아왔다. 쉽고 편안한 일상의 언어로 완성된 시적인 그림책 《빗방울의 맛》을 읽으며 로랑 모로가 특별하게 차려 낸 색깔의 향연을 만끽해 보자.
화창한 어느 여름날, 소년은 느리게 흘러가는 계절의 긴 낮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이 여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구름 한 조각이 나타나고, 다시 한 조각 또다시 한 조각이 연이어 몰려오다 하늘은 거대한 먹구름으로 가득 차 버린다. 이내 어디선가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빗방울 하나가 소년의 이마를 톡 하고 건드린다. 그렇게 느닷없이 시작된 여름 소낙비 아래로 시각, 촉각, 후각, 청각, 미각 등 주인공 소년의 모든 감각이 자연에 동화되며 본격적인 감각 놀이가 즐겁게 이어진다.
비가 오기 전의 풍경, 비가 내리는 동안의 촉감과 향기,
그리고 비가 갠 후의 산뜻함까지.
온전히 감각하며 놀 줄 아는 순수함과 궁금해하는 마음을 그린 이야기
《빗방울의 맛》은 맑은 날 하나둘 구름이 몰려오고, 수천 개의 물방울이 마구 쏟아지다가, 다시 맑게 개는 흐름으로 구성된 그림책이다. 날씨의 변화와 시간의 순서를 그대로 따라 여러 번 읽었다면, 그다음에는 공간의 이동과 장면장면 달라지는 감각의 초점을 따라 더욱 가까이 들여다보는 재미도 챙겨 보자. 풀밭에 누웠을 때 보이는 풍경이라든가,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들어보는 바람 소리라든가, 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의 감촉부터 땅을 적시는 따뜻한 비 냄새, 그리고 “어서 안 들어오고 뭐 하니!” 하는 아빠의 목소리에 빗속을 내달리는 ‘나’의 다급함과 안심하는 마음까지. 온몸을 보송하게 말린 후 집 안에서 바라보는 비의 풍경은 또 얼마나 사뭇 다른지!
“고양이는 어디로 갔을까?
작은 개미는 비 피할 곳을 찾았을까?
소들은 괜찮을까?
자전거 타던 아저씨는?
주룩주룩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들을
손가락으로 따라가 본다.” - 본문에서
창밖으로 비는 여전하지만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다. 갑자기 밤이라도 온 것처럼 어둑해진 바깥과 노란빛의 내 방이 대조되면서 아늑함은 극대화된다. 이런저런 궁금증도 생겨난다. 아까 봤던 작은 개미는 비를 잘 피했을까? 산책하던 고양이는 이럴 때 어디로 갈까? 잠든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한 자리를 지키고 서서 풀을 뜯던 소들은 괜찮을까? 한 차례 소낙비가 가져다주는 모든 풍경과 소리와 냄새를 온전히 감각하며 놀던 소년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다른 존재들의 안부로 옮겨 간다.
그리고 비는 마침내 멈춘다.
소년은 이때다 싶어 얼른 장화부터 손에 든다. 어쩌면 진짜로 재밌는 놀이는 지금부터일지도 모른다. 소년의 눈에는 호수 같기만 한 물웅덩이들이 여기저기 생겼는데, 그 호수 호수마다 하늘이 풍덩 빠져 있다. 고양이도, 개미도, 소들도 다시 다 나와 있다. 상큼한 공기가 뺨을 어루만지고, 숨이 더 잘 쉬어지는 느낌. 새로운 놀이를 시작할 때가 된 거다. 노란 장화를 신은 소년은 제자리를 폴짝 뛰며 신나게 외친다. “하나, 둘, 셋… 간다!”
빛을 한껏 머금은 듯한 원색을 표현하기 위해
6도로 특별히 인쇄된 《빗방울의 맛》의 맛!
종이와 맺어지는 물리적 관계와 즉흥성을 좋아하고, 주로 구아슈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 로랑 모로는 이번 작품을 통해 지금껏 어떤 그림책에서도 본 적 없는 고유한 색상들을 성공적으로 구현해 냈다. 보통 컬러 인쇄에서는 파랑, 빨강, 노랑, 검정 4색의 조합(4도 인쇄)으로 모든 색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통상적인데, 여기에 별색 2개를 더해 총 6도를 쌓아 작가가 최종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색상을 인쇄하는 데 성공한 것. 《빗방울의 맛》 속 모든 장면이 새롭게 우리의 눈을 붙잡고 감탄을 자아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손안의 예술이라고도 불리는 그림책에 시각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자극과 영감을 얻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작품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