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의 대작을 예고한 작품을 읽어 내는 면밀한 시선들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유형지 체험이 생생하게 담긴 이 소설은 그가 인간이 저지르는 온갖 악을 적나라하게 마주하면서도 단순히 인간에 대한 환멸에 이르지 않기 위해 노력한 산물이기도 하다. 유형지 체험은 도스토옙스키에게 악의 민낯을 지치도록 보게 했지만 한편으로 그런 속에도 인간다움이나 선한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석영중 교수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세계에서 유형 생활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도스토옙스키]는 인간 혐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고 결국 물리적 자유와 함께 증오와 절망의 족쇄로부터의 자유를 얻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유배가 그의 이후 작품에서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선악의 문제, 자유의 문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의 문제는 유배지에서 그 해결의 씨앗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186면)
그리고 『죽음의 집의 기록』에는 바로 그 〈해결의 씨앗〉이 담겨 있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세계에서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띠는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4대 장편으로 꼽히는 그의 대표작들처럼 주목받지는 못했다. 석영중 교수와 젊은 연구자들은 의기투합하여 몇 달간 이 작품을 열정적으로 읽으면서 그 속에 담긴 의미들을 조목조목 짚는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에서 의복이 드러내는 바를 짚은 손재은 씨의 글로 시작해, 시베리아 감옥과 목욕탕이라는 악의 크로노토프를 분석한 이선영 씨와 아케디아(권태)와 악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가를 살펴본 김하은 씨의 논의를 거쳐 니체의 오독과, 그로 인해 탄생한 〈초인〉 개념이 도스토옙스키의 주제와 어떻게 대치되는지를 석영중 교수가 짚어 낸다. 마지막으로는 『죽음의 집의 기록』이 신의 바라봄을 흉내 낸 이콘의 논리를 어떻게 구현하고 있는지, 왜 이 작품이 〈한 폭의 거대한 서사적 이콘〉인지를 석영중 교수가 심도 깊게 논의한다.
냉랭한 오지의 감옥인 〈죽음의 집〉에서 본 것, 그러니까 소설의 화자인 고랸치코프가 본 것, 혹은 도스토옙스키가 본 것, 그리고 여기 한국의 연구자 네 명이 본 것을 차곡차곡 담아낸 이 책은 우리의 세계를 닮은 〈죽음의 집〉을 통해 인간의 선과 악, 갱생의 문제를 면밀히 검토한다. 도스토옙스키 연구의 권위자인 석영중 교수와, 그의 후학인 젊은 연구자들이 열정적으로 이뤄 낸 이 뜻깊은 결실은 국내에 전무하다시피 한 『죽음의 집의 기록』 연구의 귀한 성과를 전해 줌과 동시에 우리가 소홀히 한 진귀한 작품을 다시 살필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