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재 이래 1백 년 만의 가장 파격적인 상고사 해석, 《古國》의 세 번째 이야기
- 한과 조선의 충돌 〈조한전쟁〉, 북경 일원에서 이루어지는 서나벌과 고구려의 건국!
《고국 3》에서는 드디어 한사군 전쟁으로 알려진 한무제의 위씨조선(낙랑) 침공이 전개된다. 흉노를 막북으로 몰아낸 무제는 창해와 낙랑 지역에 요서군을 세워 위씨조선을 압박했다. BC 109년, 한이 서역의 하서진출을 시도하는 틈을 타 강고한 우거왕이 동부도위를 선제타격하면서 〈조한전쟁〉이 발발했다. 한무제는 사방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음에도, 우거왕의 강압정치에 저항하던 조선 열국이 친흉노정권인 위씨낙랑 축출을 위해 한나라에 손을 내밀자 덥석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한의 6만 수륙 2군은 유서 깊은 옛 아사달, 험독평양을 공격했으나, 2년 가까이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무제가 이이제이 수법으로 우거왕의 측근을 매수, 겨우 우거왕을 살해했으나, 성사의 순국을 계기로 고두막한을 위시한 조선 의병들이 봉기해 한에 대한 투쟁을 전개한 끝에 한사군 설치를 저지했다. 무제가 좌장군 순체를 기시형에 처해버린 것이야말로 한의 패배를 입증한 사건이었고, 난하 서쪽으로 한2군 설치에 그치고 말았다.
위씨조선의 멸망은 조선을 열국시대로 빠뜨렸으나, 한무제 사후의 한나라가 힘을 쓰지 못하는 사이, 고두막한이 부여(진조선)의 해부루왕을 내쫓고 〈북부여〉를 건국, 동명제가 된다. 그러나 BC 68년경, 북부여의 번국들이 선비와 말갈(예맥)로 나뉘어 다투는 민족분쟁인 〈하상전쟁〉을 막지 못한 결과 타리와 왕불의 반란이 이어졌고, 금와왕의 동부여가 일어났다. 흉노는 5선우의 난립을 거쳐 동서로 분열되더니, 동흉노 호한야가 감천궁에서 선제에게 무릎을 꿇었고, 천산을 넘어간 서흉노 질지는 서역도호부에 패해 전사한다. 흉노가 2세기에 걸쳐 한과 다투며 방파제 역할을 해준 덕에, 고조선은 열국시대를 거치면서도 용케 부활의 힘을 축적할 수 있었다. 절세미녀 왕소군의 이야기는 한에 동화되는 흉노의 몰락을 뜻했다.
한이 요동에 신경쓰지 못하는 사이, 북경 연산 일대의 포구진한에서는 파소여왕이 6부를 연합해 〈서나벌〉을 건국했다. 〈동부여〉의 책성에서는 주몽이 금와왕 아들들의 핍박을 피해 외가가 있던 난하 일대의 순노로 들어오는데, 그는 이 지역의 청하백이자 동부여의 국상을 지낸 옥두진의 외손이었다. BC 37년 마침내 주몽이 〈홀본부여〉의 소서노와 연합해 흘승골성에서 〈고구려〉를 건국함으로써, 조선과 북부여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한나라는 왕정군이 다섯 황제를 이끌며 여인천하를 이루었으나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그사이 동쪽으로 피했던 기씨의 후예인 한씨들이 돌아와 낙랑군을 몰아내고 험독평양을 차지한 채 〈中마한〉을 세운다. 말갈을 제압한 주몽은 동부여를 제외한 북부여의 고토를 회복하는 통일전쟁에 과감히 나서는데, 그의 영웅적인 활동과 탁월한 리더십이야말로 감동 그 자체다. 흔히 삼한이 한반도 내에서 건국되었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고대사를 압록 안으로 가두려는 반도(식민)사관에 의한 것이고, 실제로는 모두 북경 동쪽의 조선하 일대에서 건국된 것이었다. 웅장한 연산산맥과 패수, 난하 등을 넘나들면서 대륙을 호령하는 조상들의 박진감 넘치는 삼한 건국의 이야기를 《고국 3》을 통해 새롭게 확인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