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과학자’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
동물 세계의 아름다움을 말하다
“자연은 결코 무엇 하나
헛된 일이나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는다”
dia to mēden matēn poiein tēn phusin mēde periergon
(제3권 제1장 661b24-25)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부정하다!
“아름다움은 어렵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일화’(단편 22A9)를 소개하면서 동물 세계의 아름다움, 동물 탐구에 대한 고찰의 ‘고귀함’이나 필요성, 그리고 그 고찰이 ‘존중받을 만한 고찰’임을 선언한다. 이는 플라톤의 이른바 ‘이원론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선언이다. 즉 ‘아름다움’과 ‘진리’는 이데아의 세계뿐 아니라 현실의 감각 세계에도 존재한다. 그래서 플라톤이 상투적으로 말하는 바와 달리 “아름다움은 어렵지 않다”(ouk chalepa ta kala)는 것이다.
위대한 생물학자인 찰스 다윈의 말처럼, 우리는 생물학자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두 번 놀라게 된다. 한 번은 엄청난 자료의 축적에, 또 한 번은 그 축적된 자료의 오류에. 다윈은 자연의 관찰을 통해 ‘선택’, ‘적응’과 같은 개념을 생각해 내고, ‘자연선택 메커니즘’으로 자연을 설명하면서 ‘진화론’을 주창했다. 그의 생물학적 이론에 따르면, 모든 생명체는 생존경쟁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실제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수의 자손을 남기고, 같은 종의 개체들도 제각각 다른 형질을 지니며, 특정 형질을 가진 개체가 다른 개체에 비해 환경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다. 또 그 형질 중 일부가 그 자손에게 전달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다윈의 차이
누군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진화론자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긍정적인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에 따라 ‘활동실현상태’(에네르게이아) 입장에서 보면, 가장 완전한 상태로 그 목적을 실현한 동물의 현재 상태는 완벽해야 한다. ‘생존 투쟁’과 ‘자연선택’의 관점에서 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은 더 이상 진화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다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었을까? 고전 교육을 받은 의사이자 박물학자였던 오글(Ogle, 1827~1912)은 다윈이 죽기 몇 달 전에 『동물의 부분들에 대하여』(1882년)를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했고, 출간된 책을 다윈에게 보냈다. 『종의 기원』 초판이 나온 해는 1859년인데, 실제로 다윈은 여러 글에서 오글의 말을 인용하고 있으며, 그와 서신을 교환하면서 생물학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 정보를 주고받았다. 편지에서 다윈은 고대와 현대의 귀중한 생물학적ㆍ의학적 정보의 출처로서 오글을 언급하며 존경심을 표했다. 다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 철학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깊이 있게 연구하지는 않은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다윈의 평가는 이렇다. “린네와 퀴비에는 비록 방식은 매우 다르지만 나의 두 신이었고, 늙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들은 단순한 학생에 불과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따르면, 동물의 부분(기관)은 필요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며, 그 부분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존재한다.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은 다윈주의 이론에서 동물의 부분들에 대해 이와 동일한 원리를 적용하게 만든다. 자연선택에 의한 것일 때, 유기체의 부분들은 생존을 가능하게 했거나 또는 생존의 이점을 제공했기 때문에, 있는 형태(형상)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 간의 차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이 잘 적응하고 번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는 점을 자연의 기본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반면, 다윈은 그것을 ‘잘 적응함’(well-adaptedness)이 확립되고 유지되는 메카니즘인 자연선택으로 본다는 점이다. 다윈도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어느 정도의 목적론적 사고를 받아들였지만,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만큼 강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는 ‘진화’(다윈도 이 말을 초기에는 피하고, 후기에 접어들어 쓰기 시작했다)라는 개념을 상상해 본 적도 없을 것이고, 또 이해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종’들은 그 자체로 완결되어 모든 가능성을 온전히 실현한 상태이기에, 더 이상 진화의 과정에 들어설 이유가 없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 종들은 ‘닫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린네와 퀴비에는 늙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단순한 학생에 불과했다”
전해지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집의 25% 이상이 생물학 분야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생물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고, 다만 ‘자연에 대한 일반적 연구’라고 했을 뿐이다. 여기에는 식물과 동물을 포함하여 혼의 능력에 대한 연구가 포함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에 관련된 주요 작품으로 『동물 탐구』, 『동물의 부분들에 대하여』, 『동물 생성에 대하여』 등이 전해지는데, 이 세 작품을 아리스토텔레스 생물학에 관련된 3부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강의 노트로 사용된 논고들의 모음인 『동물의 부분들에 대하여』 제1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에 관련된 주요 저작 중 하나로 ‘동물학’에 대한 일반적 입문서다. 제1권은 그 자체로 독립된 작품으로, 관찰된 연구의 축적이랄 수 있는 『동물의 부분들에 대하여』 속 나머지 세 권과는 별도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각 권마다 다루는 주제가 전혀 일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연속성의 부족은 제1권이 ‘다섯 개의 개별 논문’(강의 논고로 다섯 개의 ‘장’으로 표시됨)을 모아 놓은 것임을 보여 준다.
『동물의 부분들에 대하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적 프로그램에 따라 『동물 탐구』에서 이루어진 사실 수집을 바탕으로 “동물 각각이 그러한 상태인 것은 어떤 원인에 의한 것인지를 그 탐구에서 말한 것과는 분리해 그 자체로 고찰”(제2권 제1장 646a10-11)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몸의 기능을 밝히고, 동물과 그것들이 어울려야 하는 필연성을 보이며, 동일 기관이라도 동물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원인을 찾아내고자 한다. 제1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학 전체의 서론’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제1권은 일련의 동물에 관련된 저작의 맨 처음에 놓이는 것이 적절하다. 실제로 제2권 첫머리에서 “동물 각각이 어떤 부분으로, 그리고 얼마만큼의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동물에 대한 탐구’ 속에서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해 놓았다”라고 말함으로써, 마치 앞으로 진행할 논의가 『동물 탐구』에 직접 이어지는 논의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더욱이 제2권 이후에는 제1권을 직접 참조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다른 동물학 저작에서도 제1권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제1권은 제2권 이후와는 독립적으로, 아마 맨 나중에 쓰인 논고로 추정된다.
목적론적 원리 그 자체가 지닌
‘존재론적 힘’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몸의 각 부분의 기능(작용)을 설명함과 동시에 각각의 부분이 존재하는 필연성이나 동물에 따라 차이가 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필연성을 목적론적 방식으로 설명한다. ‘동물의 부분들’의 차이에 대한 논의에서 그는 각 동물에게 고유한 몸 상태, 생활 형태, 생활 환경 등에 비추어 그 차이에 적합하게 되어 목적에 맞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논의되는 ‘목적론’은 주로 동물의 부분들이 그 동물의 자연 본성(phusis)에 얼마나 적합한지, 또 동물 몸의 구성이 얼마나 각 동물의 생존이나 유익함이라는 목적에 적합한지를 밝힌다.
“자연은 결코 무엇 하나 헛된 일이나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으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주 언급하는 이와 유사한 구호는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다. “자연은 헛된 일을 하지 않는다”는 철저한 목적론적 원리는 동물의 발생에 참여하는 동안 동물의 형상적 본성(또는 혼)의 지향적 행동에 대한 일반화를 구성한다. 그 원칙은 동물과 그 부분들을 생성할 때, 형상적 본성은 항상 더 좋거나 최선의 것을 행하거나, 혹은 결코 헛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원칙은 가능한 한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형상적 본성의 행동에 대한 인과적인 특성화인 셈이다. 이러한 형상적 본성에 기인하는 다양한 종류의 행위들은 동물과 그 부분들의 만듦에서 전형적으로 획득되는 다양한 종류의 인과관계 작동을 반영한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목적론적 원리는 자연의 목적론을 상기시키기 위한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목적론적 원리들 자체가 ‘존재론적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