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희 한화그룹 창업회장은 국내에서는 한국의 ‘노벨(Alfred Nobel)’, 주한 미 8군 사령관을 지낸 장성들 사이에서는 ‘다이너마이트 김(Dynamite Kim)’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김종희 회장은 스스로 자신을 화약인(火藥人)이라고 했다.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해방을 맞이했을 때 한국 땅에는 모두 4개의 화약공장이 있었다. 그중 3개는 38선 이북에 있었고 이남에는 1개가 있었는데 ‘인천 화약공장’이다.
일제(日帝)는 화약 산업 특성상 한국 사람들에게는 화약을 제조하는 전문지식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김종희 회장은 해방 당시 ‘조선화약공판’이라는 일본 회사 생산부 계장(다이너마이트) 직위에 있었다. 김 회장은 화약이라는 제품이 어떤 경로로 유통되고 어느 곳에 보관되는지는 알았지만, 화약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기술 부분은 몰랐다. 김 회장은 그렇지만 조선화약공판 재직 시에 틈틈이 화학 원론(일본 동경제국대학교 화학과 교재)을 읽으면서 화약의 품성, 제조 기술을 어느 정도 공부했다.
근대산업 국가는 화약의 도움 없이는 완성되지 못한다. 화약 산업은 국가 기간산업이고 국방에도 중추적인 기능을 한다. 김종희 회장은 ‘한국이 화약을 만드는 나라’, 즉 화약 국산화에 온몸을 바쳤다.
김 회장은 드디어 1957년 10월 다이너마이트 국내 생산에 성공했다.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채근과 지원도 한몫했다. 이로 인해 김 회장은 한국의 노벨이란 닉네임을 얻었고 우리가 세계 10대 경제 부국이 되는 데 기여했다.
김종희 회장은 집념이 강한 의지의 소유자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꼭 실현해 내고야 말았다. 김 회장은 그가 국민학교(현 초교)를 졸업하자 부친께서 농사꾼으로 키우려고 장에서 지게를 사다 주었으나 상급학교에 가려고 그것을 부숴버리고 서울로 올라오는 공부에 대한 열의를 보였다. 김 회장은 명문고 ‘도상(道商, 경기도립상업학교 약칭)’에 합격했으나 하숙비가 없어 천안 성환역에서 서울역까지 5시간 반의 왕복 기차 통학을 했으나 결석하는 일은 없었다.
김종희 회장은 의협심이 강했다. 도상에 다닐 때 일본 학생 4명과 조선 학생 3명이 싸우는 것을 보고 뛰어들어 일본 학생들을 패주었다. 이로 인해 퇴학 처분을 받았으며 원산(元山)상업학교로 전학해 이 학교를 졸업했다.
김종희 회장은 주한 미 8군을 상대로 화약 비즈니스를 했으며 미군의 화약 관리 대행업으로 외화 획득을 해 당시 부족했던 국가 외환 계정에 보탬을 주었다.
김 회장은 역대 주한 미 8군 사령관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그들로부터 ‘다이너마이트 김’으로 통했다. 김 회장의 영어회화 능력은 수준급이었다.
한국화약그룹의 기업 승계는 아주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김승연 회장은 약관 29세에 총수에 올랐다. 김승연 회장은 명문 경기고를 거쳐 미국 드폴대학, 멘로 대학에서 10년간 유학했다.
김승연 회장은 창업회장의 유업을 이어받아 정유, 석유화학 분야의 기초를 튼튼히 다져 그룹을 크게 키웠고, 유통, 관광 레저 분야에 진출해 사업 영역을 확대했으며 대한생명(현 한화생명)을 인수해 종합금융그룹의 면모를 갖추게 했다.
김승연 회장은 21세기를 맞아 첨단 기술 분야인 우주항공, 방산(防産)을 신규 주력사업으로 택함으로써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들 신규 사업 신장세는 놀라울 정도다.
저자는 김종희 창업회장, 김승연 회장의 사업력을 정리하면서 가급적 그분들의 내면세계를 파헤쳐보려고 노력했다. 한화그룹 성공의 숨은 힘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분들의 성함은 가급적 한문을 병기했다. 동명이인의 경우를 피하기 위해서다. 혹시 직급이나 직위가 정확하지 않더라도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