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에 독서종자가 완전히 말라버려
나라의 근본이 폐해를 입으니…”
격변하는 시대를 버티는 유학자의 삶
조병덕은 편지에서 세변(世變, 세상의 변괴)이라는 단어를 거듭 언급한다.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던 해(1800년)에 태어난 그는 세도정치기와 맞물려 부패와 민란으로 들끓는 사회를 살아가야 했다. 안으로는 크게 홍경래의 난과 진주민란이 일어나고 밖에서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입한 병인양요가 발발하면서, 19세기 조선은 뒤흔들렸다.
이 세태를 잘 반영하는 대목으로 “독서종자가 말랐다”라는 표현이 있다. 조병덕은 “나라와 사람이 제구실을 못 하는 것은 모두 삼강오상의 도가 쇠퇴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양반들이 벼슬과 과거공부에만 몰두하면서 학문과 독서종자가 끊어진 것이다. 그는 과거공부와 학문을 닦는 것을 구분하는데, 전자가 양반이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유자(유학을 공부하는 선비)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충남 보령시에 해당하는 ‘삼계리’에 은거하며 농사지으며 먹고사는 걸 고민하면서도, 학문을 놓지 않은 유학자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고문서 연구의 권위자가 발견한 ‘가서’
권력의 이해관계로 저술ㆍ편집된 실록, 문집과 달라
편지 해석은 물론 서체 연구까지 가능하도록 구성
저자 하영휘는 고문서를 통해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인문학자로, 국내 고문서 및 초서(草書, 흘려 쓴 서체) 연구의 대가다. 서강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한국 근현대서적과 고문서를 소장한 재단법인인 아단문고(현 현담문고)에서 처음 이 편지들을 만났다. 박스 안에 뒤섞인 채로 잠들어 있는 문서의 글씨며 먹색, 종이 등의 수준이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한 그가 편지의 주인이 조병덕임을 발견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전에 조선시대의 편지는 대개 쓴 사람의 명성에 따라 평가되었다. 내용이야 어떻든 명사나 명필의 편지를 귀하게 대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편지에서는 당시의 시대상을 찾아보기 어렵다. (중략) 가서는 그 내용이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의 내밀한 일이라는 점에서, 예의와 형식에 매인 그 밖의 편지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_본문에서
저자는 조병덕의 편지를 통해 가족 간에 주고받은 편지인 가서(家書)라는 개념을 발견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가서는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저술 및 편집된 『조선왕조실록』이나 여느 문집과 차별화된다. 또 후대 역사학자의 주관적인 사관(史觀)으로 쓴 글과도 구분된다.
이 책에서는 초판에서 부록으로 작게 실은 편지 전문을 본문에 나눠 싣고, 이 중 중요한 편지를 추려 원본 사진과 석문(탈초), 번역 순으로 실었다. 본문에서 다루지 못한 것은 후반부 ‘편지선’으로 돌렸다. 특히 간찰 사진의 크기를 글씨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키워, 서체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