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같았던 삶을 정리하며
1994년 6월 말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결국 병원에 다시 입원한 이범영은 전신에 암이 전이되고 사실상 치료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병상을 지켰던 친구 박승옥은 그의 책 『아버지의 자리』에서 “그는 특이하게도 놀랄 만치 빠르게 단 며칠 만에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짧은 기간 동안 그는 그의 삶을, 그가 맺었던 인간관계와 그가 가졌던 모든 애증을 차분히 정리하고 나서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삶과 인간관계와 애증을 어떻게 정리했을까? 죽음과 싸우고 있을 때 문병했던 어떤 이는 그가 흉중에 있던 회한(悔恨)과 허망함에 대해 말했다고도 했고, 또 어떤 이는 그 상황에서도 운동의 장래를 고심하는 얘기만 ‘내내 떠들었다’며 탄식했다.
삶을 정리하며 했던 그의 회한과 고심의 첫 자리는 ‘운동 때문에’ 그의 삶의 중심에서 비켜나 있던 그의 가족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바로 아이 엄마, 아내와 애들이었다고 했고, 이어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생각났다고 했다. 소위 ‘직업운동가’로 살면서 가족들에게 떠안긴 상처와 불성실, 열지 못한 마음과 제대로 주지 못한 사랑, 불효함이 그를 회한하게 했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삶이 끝나는 것이라면 너무 쓸쓸하고 허망하다 했고, 그 의지 견정(堅定)한 사람이 죽음 이후의 ‘영혼’을 말하기도 했다.
정리가 어려웠던 고심과 회한의 또 한 자락은 ‘혁명의 시대’ 이후에 대한 대비였다. 92년 대통령선거는 격동과 혁명의 시대를 마감하는 예고편이었고, 그 선거 결과에 그는 크게 낙담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선거 결과에 ‘분노하고 슬퍼하고 있을’ 그의 청년 동지들에게 그는 더 깊고 넓은 대중화와 생활력 확보, 질서 있는 전선 재정비 등을 통해 ‘장기전’에 대비할 것을 주문하였다. 일찍이 한국의 민주주의운동은 가두에서의 대중투쟁이 승패를 가를 것이라 주장했던 그는 격동과 혁명의 시대가 이제 마감되고 있음을 예감했고, 그때부터 ‘선거와 제도정치의 시대가 본격화되면 운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장래 경로에 대한 그의 답은 여전히 전선운동 고수와 민주연합정부의 수립이었다. 그는 전선운동체가 그대로 제도정치의 한 축이 되거나 혹은 정당으로 전화되는 길을 생각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아마도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같은 경로를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그 경로의 중심에 있어야 할 김근태 선배가 전선을 떠나 제도정치로 개별 이전하는 것에 대해 그는 많이 불편해했고 안타깝게 생각했다.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도 문병온 사람들에게 연합정부론을 내내 ‘떠들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김근태 선배는 그가 짧은 기간 동안 자신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정리했고 그래서 “아무런 원망도 아무런 한도 남기지 않고 떠난 삶”이라고 말했지만, 그 역시 못다 한 회한과 해결 어려운 운동 숙제를 죽는 순간까지 붙들고 고심했다.
‘혁명의 시대’에 대한 성찰
이범영이 죽는 순간까지 생각을 놓지 못했던 운동적 문제에 대해 아직 답을 못 만들고 있기는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통일운동은 남북관계의 부침과 함께 현재는 지속가능성까지 걱정할 상황에 있고, 전선운동의 약화와 민주·진보정당들의 분립 상황은 지속되고 있다. 환경·생태와 젠더, 평화운동 등이 새로 성장한 반면, 일부 운동은 여전하거나 혹은 약화되고 있다.
이범영의 피땀이 배어 있는 한청협도 1998년 9월에 활동을 정리하고 해산했다. 그러나 한청협 해산에도 불구하고 거기 모였던 ‘이범영과 청년운동’의 수많은 유산(legacy), 자원들은 각 지역과 부문운동, 그리고 각 정당들에서 중견 역량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범영이 살아 있었다면 이 자원들은 자연스런 산개 대신 좀 더 질서 있는 대응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범영은 우리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어내는 힘을 가졌고, 우리들의 확고한 구심이었다. 그러나 뿔뿔이 산개해 있는 현실 때문에 ‘그가 지금 우리와 함께라면’ 같은 부질없는 가정의 반복은 이제 끝내야 한다. 그리움 때문에 시시때때로 그를 호출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오늘의 현실은 그의 ‘부재’ 탓이 아니라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가 이 책을 ‘혁명의 시대’를 불꽃처럼 살다 간 이범영의 ‘운동과 사상’에 중점을 두기로 한 것도 그 이유에서이다. 그의 운동과 사상에 대한 정리를 통해 그 시대를 함께했던 우리들의 생각과 운동을 30년 후의 시점에서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이범영 삶의 편린들과 그와의 인연을 다룬 일화들은 추모문집 등에 이미 많이 실려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 책을 누가 읽을까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우리에게 너무 소중한 사람이고, 30년을 변함없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그와의 추억으로 취하게 하는 사람이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그를 ‘청년운동가’이자 ‘직업운동가’로 기억하고 호출할 소구점(訴求點)이 많지 않은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이 책을 읽을 사람들이 대부분 그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 지라도, 새로운 독자들을 가정하면서 이범영의 역사성을 그 시대 민주화운동 속에서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