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최고의 귀공자에서 일제가 두려워한 항일투쟁가로!
★ 이종각, 이단해 등 이명으로 살았던 숙명 같은 독립운동가의 삶!
★ 중국 천진 시내를 뒤흔든 ‘태극기 자동차 애국 행진’을 주도하다
★ 다물단의 이름으로 거물 밀정 김달하를 처단하다
★ 1928년 이규준의 마지막 행선지 석가장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파헤치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선각자, 이석영
이석영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자 형제들과 함께 만주로 집단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주인공이다. 당대 최고의 부자였던 양부 이유원에게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그는 이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의 종잣돈으로 활용했다. 많은 애국지사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했고,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온 수많은 젊은이를 먹이고 입히며 독립운동의 동량으로 키워냈다. 그의 재정적 뒷받침이 없었다면, 한국의 독립운동사는 지금과 결이 다른 단어들로 채워졌을 것이다.
이석영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두 동생 이회영과 이시영의 이름 뒤에 평생 머물렀지만, ‘저동 육형제’의 실질적인 리더이자 선각자였다. 특히 ‘교육 구국’, 즉 교육으로 구국의 꿈을 이루는 것은 이석영의 소신이자 신념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6월에 개교해 1920년 7월에 폐교될 때까지 약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독립군의 요람 역할을 해냈다.
이석영이 꿈꾸는 세상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공화국이었고, 적서와 남녀의 차별이 없는 평등한 세상이었다. 이석영의 삶은 칠흑 같은 시대를 비추는 은은한 달빛과 같았다.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헌신’이었다. 이석영은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내놓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공을 내세우거나 후회의 기색을 비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헌신’이었다. 이석영의 말년은 비참했다. 중국 상해 뒷골목에서 굶어죽다시피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신흥무관학교의 아버지’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의 인생은 충분히 빛나는 것이었다.
이규준, 신흥무관학교 생도에서 독립투사로!
이규준은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해 생도 시절부터 항일 투쟁에 나섰다. 1913년 교직원과 졸업생, 재학생이 함께 참여하는 독립운동단체 ‘신흥교우단’을 결성하고 국내외 독립투사들과 연대해 활동했다. 그는 신흥교우단의 ‘규칙기초위원’을 맡아 규범ㆍ강령ㆍ신조를 만들었는데, 그중 “나는 국토를 찾고자 이 몸을 바쳤노라”로 시작되는 ‘선열의 시범’은 훗날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즐겨 암송하는 맹세의 언약이 되었다.
신흥교우단이 독립 의지를 앙양시키고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발행한 선전지이자 계몽지인 『신흥교우보』(제2호)에는 이규준의 한시 「추야강무유감」이 실렸다. 당시 18세의 이규준이 이 한시에서 노래한 것은 일제에 대한 처절한 복수나 응징이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야만적인 폭력과 전쟁 그 너머의 새로운 세상, 진정한 평화를 향한 꿈이었다.
1915년 봄, 이규준은 신흥무관학교 4년 과정의 본과 졸업생이 되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다는 것은 이규준의 홀로서기가 시작되었다는 의미다. 아버지 이석영에게도 이규준은 품 안의 자식이 아니었다. 이석영이 심혈을 기울여 쌓은 독립운동의 초석 위에서 이규준이 펼쳐갈 ‘투사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2년간 의무적으로 독립군 또는 교사 등으로 현장에서 복무하는 게 불문율이었다. 이규준은 1917년을 전후해 특별한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국내로 파견되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두 숙부인 이회영과 이시영 사이에서 연락요원 역할을 하는 비밀 임무였다. 이때부터 이규준은 일제의 불령선인 명단에 올라 감시의 대상이 된다.
상해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 모집 사건
이규준의 항일 애국 활동은 1919년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지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임시정부과 연계해 독립투쟁을 펼치게 된 것이다. 1920년 가을, 이규준은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 당시 임시정부 재무총장을 맡고 있던 이시영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경성과 충청권을 오가며 여러 명의 동지를 규합해 활동한다. 이 무렵 임시정부는 비밀 연락원인 ‘특파원’ 제도를 운용하고 있었다. 젊은 인재들을 특파원으로 각지에 파견해 현지 비밀결사와 연계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선전 활동을 폈던 것이다.
신출귀몰하며 일제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던 이규준은 이듬해인 1921년 결국 체포되어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제령 제7호는 기미독립운동으로 지대한 타격을 받은 일제가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19년 4월 제정ㆍ공포하고 시행한 법령이었다. 이규준은 이 사건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자신을 온전히 내던져야 하는 의열 투쟁의 길로 접어든다.
김구, 나석주와 함께 펼친 ‘망명객 민정식 보호 작전’
이규준의 행적은 1924년 봄 ‘혁명의 도시’ 상해를 떠들썩하게 했던 ‘민정식 망명 사건’에서도 확인된다. 민정식은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인 민영익의 유일한 아들로 400만 평이 넘는 토지와 저택 등 거대한 부를 물려받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경성에서 자취를 감춘 지 한 달여 만에 가족들과 망명하기 위해 상해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것은 홍콩, 상해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했던 민영익이 상해에서 타계하기 전, 외국계 은행에 수십만 달러를 예치하고 아들 민정식만 찾을 수 있도록 조치해놓았다는 것이었다. 지금 화폐 가치로 수백억 원에 이르는 거액이었다.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던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민정식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자금을 기부받게 된다면 정체 중이던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로를 틔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한 일제는 상해 총영사관, 본토 내각, 조선총독부 등이 긴밀히 연계해 극력 저지에 나선다. 막대한 자금이 임시정부에 유입되면 항일독립투쟁의 불길이 더욱 거세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민정식의 기부를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임시정부도 이에 맞서 민정식을 지키려 했다. 이규준은 임시정부 내무총장 김구, 경무국 경호원 나석주 등과 연대해 ‘민정식 보호 임무’를 수행했다. 일제의 문건을 통해서도 이규준이 민정식 망명 사건에 관여한 정황이 확인된다. 이때의 인연으로 그 이듬해에 나석주는 이규준이 이끄는 다물단과 함께 독자적으로 국내 의열 투쟁을 추진하기도 했다.
중국 천진 시내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다
1925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 6주년을 기념해 중국 천진 시내에서 한 무리의 애국 청년들이 태극기를 단 자동차에 올라 시위를 했다. 프랑스 조계를 시작으로 영국과 이탈리아 조계, 옛 독일·러시아 조계, 일부 중국인 거리까지 가로지르면서 독립선언기념문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이 ‘태극기 자동차 애국 행진’은 각국 외국인들의 눈길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특히 망국의 한을 품고 살아가던 한인들에게 태극기 자동차 시위는 속을 뻥 뚫리게 하는 ‘사이다 질주’와 같았다. 이 애국 청년들의 중심에는 이규준이 있었다. 일제 천진 총영사가 내각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문서에는 이규준이 이명인 ‘이단해’로 거명되었다.
‘태극기 자동차 애국 행진’은 ‘한국이 독립정부를 세웠으며, 한국민이 간절히 광복을 염원한다’는 사실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알리고 여론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동안 천진 한인 사회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워온 일제도 의표를 찔리고 말았다. 일제가 경계했던 것은 이 태극기 자동차 시위를 계기로 옥외 가두시위로 점화되는 사태였다. 이규준은 남다른 실행력이 있어 ‘행동가’로 알려졌다. 일단 마음의 결정을 내리면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이규준이 넘치는 기백과 함께 전략적 판단력도 겸비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게 이규준은 더 담대하고 더 냉철한 독립투사로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거물 밀정’ 김달하를 처단하다
1923년 이규준이 중국 북경에서 조직한 ‘다물단’은 직접 행동으로 의열 투쟁을 하기 위한 비밀결사였다. 초기에는 서로 뜻이 통하고 신뢰가 쌓여 있는 신흥학우단 출신들로 단원을 구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물단이라는 이름은 “옛 강토를 회복하고 민족의 기상을 드높인다”는 신흥무관학교의 ‘다물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다물단은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선전 활동을 벌이다가 일제의 밀정이나 변절자가 포착되면 이를 응징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물단의 설립 취지 등 사상적 기틀을 다진 이는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였다. ‘단재 연보’에는 “이규준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다물단의 선언문을 기초해주었으며, 이 조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물단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거물 밀정’ 김달하 처단 사건이었다. 김달하는 북경 한인 사회의 유력 인사이자 박학다식한 한학자였지만, 조선총독부에 은밀히 줄을 대고 고급 밀정 노릇을 했다. 이규준은 사촌 여동생 이규숙(이회영의 딸)이 알려준 김달하 집의 내부 정황 등을 토대로 거사 계획을 세워 실행했다. 1925년 3월 다물단원 이종희와 이기환이 김달하의 집으로 찾아갔고, 이 두 사람이 사라진 뒤 김달하는 교살당한 사체로 발견되었다. 김창숙은 “다물단원들이 그(김달하)를 처단했다”고 했고, 김달하 사건이 일어난 지 2년 후 일제 경찰은 한 문건에서 “다물단원이 1925년 북경에서 ‘조선총독부 촉탁’ 조선인 김달하를 살해했다”고 서술해 그가 밀정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1928년 이규준은 왜 석가장으로 갔을까?
이규준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는 문서는 독립운동가 이우민의 경찰 신문조서다. 이우민은 치안 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1930년 서대문경찰서에서 여러 차례 신문을 받았는데, 이규준의 행방에 대해 “이규준이 1928년 여름 석가장에서 병사했다”고 진술했다. 저동 육형제 집안의 일각에서는 ‘이규준이 석가장으로 간다며 상해를 떠난 뒤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양측에서 이규준의 최종 행선지로 거론되는 장소는 ‘석가장’이다. 그렇다면 이규준은 석가장에서 병으로 사망한 것일까, 아니면 일제의 마수로 인해 죽음을 맞았던 것일까?
1927년 가을부터 만주 등지에서는 한인 구축(驅逐) 사건이 연이어 벌어져 중국에 거주 중인 한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만주 군벌의 일부 군인과 관리들이 한인들을 일제 침략주의의 앞잡이로 몰아 핍박하고 내쫓은 사건이었다.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에서는 한인 보호와 대응을 요구하는 교민들의 목소리가 빗발쳤다. 그리고 1928년 봄, 석가장 관헌들이 한인 거주민들을 핍박하고 내쫓아 수십 명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해 5월에 일제는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제남 사건’을 일으켰다. 산동성 제남에 배치된 일본군이 중국 국민혁명군을 기습해 수많은 중국 군민이 사상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후 중국에서는 반일 시위가 거세게 번졌는데 공교롭게도 이즈음 친일 매체에 의해 석가장의 한인 구축 소식 등이 부풀려 전해졌다. 이는 일제가 제남 사건 이후 중국인들의 끓어오르는 배일 감정을 한인 쪽으로 분출하도록 교묘히 유도해, 한인과 중국인을 이간질시키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흔들려는 책략이었다.
당시 상해의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단체들은 일제의 이간계를 떠올리고 대응책을 고심했을 것이다. 일제의 밀정과 비밀경찰들이 사건을 왜곡시키고 악의적으로 괴담을 퍼뜨렸을 개연성이 컸기 때문이다. 이규준의 석가장행(行)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감행되었다. 그에게 한인 구축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고 일제의 첩자들을 저지하라는 비밀 임무가 부여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담대하고 도전적이던 이규준의 행적으로 보아 그가 위험한 임무를 자청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절손에서 직계 후손으로
1945년 광복 이후 이석영·이규준 부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사람들의 기억 너머로 사라져갔다. 세상에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이규준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공로자이자 많은 독립지사를 조용히 도운 후원자로서 존경을 받았던 이석영마저 ‘잊힌 존재’가 된 것은 의외였다. 그 시절 독립투사들에게 조국의 광복 이외에 이름을 얻고 말고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하지만 역사의 그늘에 묻힌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이름을 되찾아주는 것과 그 뜻을 후대와 함께 기리는 것은 그들이 그토록 헌신해 이루려 했던 ‘광복을 이룬 조국’이 마땅히 해야 할 책무이기도 했다.
그런데 엄혹했던 시대에 독립운동가들과 그 가족들이 살아남기 위해 썼던 이명들이 광복의 조국에서는 그분들의 이름을 가리는 장막이 되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에게 이명은 자신과 조직, 가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보호색’과 같았다.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이명을 썼지만, 오히려 그 이명으로 인해 유훈(遺勳)이 가려지는 아이러니한 일도 빚어졌다. 그래서 해당 이명이 독립운동가가 사용하던 이명이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면 그 이명으로 활동한 공훈마저 묻혀버리는 안타까운 일도 적지 않았다.
이규준의 둘째 딸 이숙온의 맏딸 김용애는 이석영·이규준 부자의 후손이 절멸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석영과 이규준에게는 세 딸과 세 손녀가 있었으며 그 후손들이 현재 여러 명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밝혀야 했다. 이석영·이규준 부자는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 삶”을 살았지만, 절손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은 두 분 할아버지가 남긴 삶의 자취를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우선, 정황 증거가 될 만한 자료와 사진을 모았다. ‘조국의 혈연을 찾아달라’는 제목으로 이규준의 셋째 딸 이우숙의 애타는 심정과 기구한 가족사를 전한 『동아일보』(1967년 10월 14일) 기사, 도산 안창호가 주례를 선 이규준의 맏딸 이온숙의 1929년 상해 결혼식 사진, 백범 김구가 해방 후 1948년 새해 선물로 김용애에게 써준 ‘답설’ 친필 휘호, 이석영의 맏며느리이자 이규준의 아내인 한평우가 1977년 대만의 셋째 딸 우숙과의 재회 때 찍은 가족 사진, 온숙·숙온·우숙 세 자매가 함께 찍은 사진 등 결정적인 물증과 여러 후손의 일관된 주장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침내 결정적인 공문서가 대만에서 나왔다. 김용애와 가족들은 대만에서 전달받은 한 장의 사진을 보고 벅차오르는 감격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우숙의 호적등본에는 ‘부(父) 이규준(李圭駿), 모(母) 한씨(韓氏)’의 3녀(三女)라는 글자가 또렷이 기입되어 있었다. 이석영, 이규준, 이온숙·이숙온·이우숙으로 이어지는 직계가족이 공문서를 통해 최초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최종적으로 대만에 거주 중인 후손과 독립유공자 유족 등록 신청을 한 김용애와 최광희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유전자 검사를 의뢰한 결과 양측이 동일 모계혈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김용애·최광희를 비롯해 대만 거주 이우숙의 자녀 등 10명이 이석영의 외증손과 이규준의 외손으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