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적으로 관리화된 사회에서 요구되는
현실의 처참함에 대한 인식
‘총체적’이란 ‘전체화한다’, ‘철저하게 관리한다(durchverwaltend)’는 뜻이다. 여기서 관리란 대상을 ‘조작과 지배의 물건’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총체적으로 관리당하는 인간은 언제든 반복할 수 있고 대체할 수 있는 관점에서 처리된다. 사물화된 삶에서 인간은 자율성을 상실하여 제대로 된 주체로 살아갈 수 없다. 자아는 죽어 있으므로 주체는 더 이상 사유하지 못한다. 고유성을 존중받지도 못하고, 총체화된 관리사회가 주입하는 사상에 침윤될 뿐이다. 그 결과 모든 인간은 획일화된 원칙에 종속되어 천편일률적인 모습으로 살아간다.
이 동일성의 원리가 정치적으로 구현된 가장 끔찍한 역사적 사례가 바로 아우슈비츠다. 이 아우슈비츠에서 아도르노는 ‘문화의 악취’를 느끼고 ‘문화의 실패’를 확인한다. 아우슈비츠의 대량 학살은 절대화된 동일시의 무자비한 실행에서 초래되었다. 그것은 환원불가능한 개인의 고유성을 동일성의 원리로 완벽하게 폐기한 무자비한 정치적 실천 사례다. 아우슈비츠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그와 비슷한 어떠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순수한 직접성의 계기를 불신하는 일이다. 부정적(否定的)인 태도로 모든 것을 비판하면서 거리를 두고, 거리를 두면서 공감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감 속에서 비판하고, 비판 속에서 사랑하는 모순된 태도를 견지하는 일, 그래서 내재성과 초월성의 긴장을 현실의 변화를 위한 생산적 계기로 삼는 것이 문화이해에서도 절실하다.
낯선 것에 대한 포용,
예술과 철학이 그려 내는 유토피아
저자는 아도르노의 미학을 구성하는 주요한 개념들을 타자성(das Andere/the Other)이라는 관점에서 정교하게 재배열한다. 아도르노의 미학적 문제의식은 무엇이고, 그 현실적 타당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아도르노에게서 타자적이고 이질적인 것은 예술이 추구하는 지향점으로서 사물화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문화 산업이 내세우는 효용이나 수익 혹은 교환의 원리에 순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은 낯선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술의 유토피아란 타자성을 옹호하는 것이고, 낯선 것을 추방하지 않는 상태다. 거기에서 모든 소외는 지양될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를 위한 예술의 지향은 아마 철학의 지향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즉, 예술과 철학은 낯설고 이질적이고 타자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포용한다. 이렇게 낯선 것을 외면하거나 억압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다면 삶의 소외는 현격히 줄어들 것이다. 낯선 것을 포용하는 이러한 상태야말로 예술과 철학과 삶의 유토피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