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길을 물으러 나는 묘지에 갔다”
역사의 발자취에 남겨진 인물의 묘지에서
발견한 죽음 그리고 삶의 기록
2019년 전작 《세상은 묘지 위에 세워져 있다》(해외편)를 통해 “묘지”라는 키워드로 여행 인문학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작가 이희인이 이번에는 우리나라의 묘지를 답사했다. 20여 년 전부터 해외여행을 떠날 때마다 유명인들의 묘지를 찾은 저자는 그만큼 자주 우리나라 곳곳의 묘지와 무덤을 찾았고, 이번에 그동안 답사한 우리나라 묘지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이 책 《세상은 묘지 위에 세워져 있다》(국내편)은 앞선 책과 마찬가지로 묘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가지만, 그와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전작이 근대 이래 세계사의 중심 자리를 꿰찬 서양 문화의 뿌리를 좇는 학문, 예술 기행에 가까웠다면, 이번 책은 다분히 “근현대 인물사”의 성격이 강하다. 서구와의 만남과 식민 경험, 전쟁과 분단, 산업화와 민주화로 이어지는 격랑의 근현대사 속에 첨예하게 대립한 가치들이 명멸해온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저자는 근대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와 함께해온 수많은 유명인의 묘지를 찾아 서울 망우리 묘지부터 제주, 전남 땅끝을 넘어 만주와 러시아 하바롭스키까지 오갔다. 그 여정에서 만난 사람도 다양하다. 추사 김정희, 정약용 형제와 전봉준, 최제우 등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수놓은 인물부터 유관순과 김구, 권오설, 김알렉산드라, 안중근 등 독립운동에 몸 바친 열사들, 이준, 여운형, 전태일, 조영래, 문익환, 김종철, 권정생 등 한국전쟁 이후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 헌신한 인물, 그리고 윤동주와 백석, 한용운, 염상섭, 황순원, 이중섭부터 신동엽, 박경리, 이청준, 기형도, 그리고 유재하와 김현식까지 글과 그림, 음악으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 작가들의 내면 풍경까지 담았다.
수많은 묘지를 기행하고, 그 주인들을 되짚어보면서 저자가 찾으려 한 것은 그들의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다.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무수한 인물들의 묘지에서 삶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성찰하는 저자의 글을 따라가면, 묘지가 멀리하고 기피할 장소만은 아닌, 삶의 의미와 가치관의 혼돈을 느낄 때 찾아가 마음을 여미고 올 수 있는 의미 있는 장소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무덤의 역사, 역사의 무덤을 만나는 새로운 여행”
묘지를 통해 만나는 우리나라 근현대 인물사
전북 정읍에는 전봉준의 묘가 있다. 물론 그의 시신은 행방이 묘연하기에 그곳에 있는 묘는 시신이 없는 허묘다. 비슷한 시기를 살았으나 그와 다른 길을 선택한 김옥균의 묘(충남 아산 영인면)도 허묘다. 저자는 두 사람의 빈 무덤을 돌아보며 역사의 아이러니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의 묘를 찾아나선 김에 광주 천진암에 가고, 《자산어보》가 탄생한 흑산도에 가고, 다시 남양주에 간다. 김정희의 삶을 추적하며 유배지인 제주와 그의 묘가 있는 충남 예산으로 향한다. 명성황후가 잠든 영휘원에서 엘리스 루스벨트(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가 올라탄 석수를 찾으러 홍릉으로 떠나면서 구한말의 외교 상황과 고종의 삶을 살핀다.
또한 저자는 효창공원에서 기묘한 역사를 이야기한다. 효창공원은 해방 후 김구가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유해를 모신 곳이고, 안중근의 허묘가 있는 곳이며, 훗날 김구 자신이 몸을 누인 곳이다. 현충원이 없던 시절 효창원은 국가 묘원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효창원을 의식해 출입자를 불시검문할 정도였고, 급기야 맞은편에 거대한 운동장을 지었다. 박정희 정권은 김구의 묘역 바로 위에 반공투사위령탑을 세우더니 육영수 여사 공덕비도 세웠다. 그 뒤 효창공원은 명칭도, 관리 주체도 몇 차례 바뀌었고, 밤마다 거대한 조명등이 켜진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사람들의 함성이 울리는 기묘한 공간이 되었다.
이렇듯 이 책은 묘지를 통해 근현대 인물의 역사을 추적하는 책답게, 단순히 유명인의 묘지만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인물과 관련한 기념관이나 문학관, 생가, 역사적 현장 등 유관한 장소들도 함께 안내한다. 아울러 해당 인물이 살았던 시대적 환경 등을 더듬어 우리가 익히 아는 도시, 장소를 새롭게 재해석한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단순히 풍광과 맛만을 즐기는 소비적인 여행을 넘어, 학문과 사색의 여행을 제공한다.
잊히지 않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묘지의 사잇길에서 마주치는 역사와 예술, 그 영원의 길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며, 죽음은 삶을 살아가는 가장 훌륭한 푯대이자 교사”이다. 묘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순환”이라는 삶의 키워드에 맞닿아 있다. 저자의 말대로 “조상의 살과 뼈가 썩은 흙에서 자라난 작물을 먹으며 산 사람이 삶을 연명하고, 그 역시 한 줌 흙으로 화해 후손들을 살찌우는 거대한 순환” 속에 우리는 살아가기 때문이다.
묘지가 말하는 것은 끝이 아니라 영원이다. 육신은 비록 한 기 묘지에 담길지라도 그 주인이 남긴 역사와 예술은 새로운 생명을 얻고 새로운 역사를 따라 살아간다. 묘지를 찾아가는 길에서부터 마주치는 모든 순간과 묘지와 묘지를 잇는 사잇길에서 마주치는 역사는 결코 사라지고 잊힌 것이 아니다. 그 길의 끝에 있는 묘지와 그 주인을 둘러싼 삶의 궤적을 하나하나 되새기다 보면, 역사는 다시 살아나고 예술은 영원의 빛을 발한다.
충남 예산 신암면에는 추사 김정희의 생가와 그의 묘지가 함께 있다. 그곳의 추사고택에 가면 나무 기둥마다 세로로 써 붙인 그의 글씨를 볼 수 있다. 김정희의 삶은 그 글씨를 통해 수백 년의 세월을 지난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경주시 현곡면 구미산 동쪽 능선에 자리한 최제우의 묘 일대는 천도교 용담성지가 되어 평등 세상을 꿈꾼 그의 사상이 이어지고 있다. 망우리 묘지의 사잇길을 걷노라면 한용운과 오세창, 방정환, 조봉암 등의 묘지가 처연하게 그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경기도 양주 어느 공설묘지에 잠들어 있는 천상병의 묘지 곁에 놓인 묘비에는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는 〈귀천〉의 한 구절이 생전의 천진한 웃음처럼 가뿐한 서체로 새겨져 있다. 분당 메모리얼파크에 있는 작곡가 이영훈의 묘지에는 “광화문 연가”라 적힌 검정 대리석이 눈길을 끈다. 그가 생전 자신의 페르소나였던 가수 이문세에게 했다던 “문세 씨, 우리가 만든 발라드가 후세에 남을 수 있게 해줘요. 우리가 젊었을 때 몸 바쳐서 만든 거잖아”라는 말처럼, 그의 음악은 영원의 길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리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