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에 싸인 이국적 울림 사뮈엘 베케트
사뮈엘 베케트는 스위프트, 와일드, 예이츠, 쇼, 싱 그리고 조이스 뒤를 잇는 아일랜드 문학의 계승자이다. 언어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영어와 프랑스어는 물론 그리스어, 독일어, 에스파냐어도 잘했으며 멕시코 시집을 번역하기도 했다. 예이츠와 쇼에 이어 아일랜드 작가로는 세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었으나, 대중 앞에 나서기를 꺼렸기에 연설을 피하려고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극작가이며, 자신이 속한 동시대 사람들의 삶의 조건과 양상을 독특한 극작법으로 생생하고 깊이 있게 표현했다.
기다림 속의 깨달음〈고도를 기다리며〉
1953년 겨울 파리 소극장 바빌론에서 처음 상연된 이래, 〈고도를 기다리며〉는 지금까지 수십 가지 언어로 번역되어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연되었다. 1969년 노벨문학상 수상했으며, 이 작품만큼 평론가나 연구가들의 흥미를 끄는 작품은 현대극 가운데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 속에서 깨닫는 인간의 부조리와 작가의 실존주의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 있고, 수많은 베케트 연구가들에 의해 오늘날 이 작품에 관해 온갖 해석이 시도되고 있다.
이 연극의 등장인물은 떠돌이 두 사람, 거만하고 난폭한 남자와 그의 노예, 그리고 막이 끝날 때마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며 알리는 한 소년, 이렇게 겨우 다섯뿐이다.
두 떠돌이,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어느 시골 길가 앙상한 나무 옆에서 ‘고도(Godot)’라는 인물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극이 진행될수록 고도라는 인물의 이미지는 혼란스러워지고, 마침내 그 존재조차 무척이나 의심스러워진다. 숨 막힐 듯 막막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손꼽아 기다리던 구원의 손길은 과연 언제야 올 것인가.
시대를 앞선 새로운 연극의 가능성
영원한 수수께끼의 걸작 〈고도를 기다리며〉는 미래의 희망을 간절히 꿈꾸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그 희망 때문에 끝내 지쳐 버린 오늘날 수많은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완전히 절망에 빠뜨리지는 않는다. 그 희망의 불빛은 꺼질 듯 말 듯 하면서 여전히 우리 앞에 아른거린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을 완전히 놓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매력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기다리는 행동, 아니 그보다는 기다리는 상태를 무대에 올리는 독창적인 발상에 따라 ‘거기에 있다’고 하는 인간의 근원적 조건을 주제로 한 가장 단순하면서도 즉흥적인 연극이다. 숙명적이거나 정열적인 연극, 갈등극 또는 상황극도 아닌 그저 존재에 대한 연극이다. 여기에 새로운 연극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흔히 ‘고도’는 신(God)을 의미하리라. 그러나 결코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 고도가 누구(무엇)인지는 이 연극을 접하는 사람들 저마다의 처지와 그들이 무엇을 바라고 있느냐에 따라 수많은 의미로 자유롭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도를 기다리며〉는 철저하게 관객을 향해 열려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베케트는 “고도가 누구인지는 나도 모른다. 알고 있다면 작품 속에 써 넣었을 것이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작자는 오히려 ‘고도’라는 함정을 파 놓고 거기에 관객이나 평론가를 불러들여 기묘함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 〈몰로이〉
〈몰로이〉는 1947년에 집필되어, 1951년 파리의 미뉘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그 무렵 프랑스 비평가들로부터 실존주의문학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사르트르 《구토》에 이어 가장 유망한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는다. 이때부터 베케트라는 이름이 프랑스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알려지는데, 주목할 점은 〈몰로이〉가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쓰였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는 베케트의 주된 관심사인 인생의 부조리함, 자아탐구, 언어의 한계, 글쓰기 자체의 문제들, 작가의 죽음 등이 모두 담겨 있다.
이야기는 실질적인 사건 전개 없이 끊임없이 우회하며 제자리를 맴돌고, 주인공 몰로이의 정체는 아주 불확실하며, 그의 이름마저도 어머니 이름과 혼동되어 쓰인다. 시간과 공간은 우연에 내맡겨진 채로 무질서하게 저마다 떠다닌다. 실제 사건들은 환상으로 처리되거나 생략되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주인공 자신도 모른다. 꾸밈없는 일상 언어 사용은 이따금 거칠고 저속한 말들이 그대로 튀어나온다.
제1부와 제2부로 나누어진 〈몰로이〉는 이중 구조로서 서로 거울이 미지의 역할을 하는 대칭 구성이다. 1부와 2부는 분리된 이야기이면서도 반복과 이중적인 이미지로 이어진다. 몰로이와 모랑 사이의 혼란은 상호 주체적 혼란이다. 몰로이는 모랑의 기억할 수 없는 남일 뿐이며, 모랑의 정체는 몰로이로 되어가는 과정 속에 있는 타인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인물들 사이의 이러한 변형 이미지들의 반복은 소설의 불확실함을 한층 강화한다.
베케트는 〈몰로이〉에서 작품의 무의미를 드러내고 무(無)의 공간을 창조하기 위한 독특한 표현기법을 쓰고 있다. 그것은 한 번 말해진 선언을 곧이어 약화나 취소하는 형식이다. 이러한 선언과 부정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몰로이는 우리 눈앞에서 적힌 문장들을 고치고 사색의 결과들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한 사건에 대한 가정을 바꿈으로써 사실이 달라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선언과 부정 표현기법은 하나의 놀이처럼 작품에 역동적인 움직임을 부여해 준다. 사실 불확실과 방황의 안개 사이로 이러한 놀이 요소를 발견한다면 독자들은 이 소설에서 더욱 많은 유쾌함과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베케트 독창성의 증명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
이 희곡은 표현매체에 대한 베케트의 모든 독창성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테이프리코더라는 문명의 이기에서 그는 생각지도 못한 연극적인 기능을 끌어내 보였다. 이 신기한 방법으로 흥행에서도 대성공을 거둔 ‘영어로 쓰인 가장 뛰어난 단편드라마’가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이 방법은 베케트 고유의 이상과 기술이다.
69번째 생일을 맞은 노인이 오랜 습관대로 한 해의 회고를 테이프에 녹음하려고 한다. 그는 먼저 30년 전의 테이프를 꺼내 들어본다. 만 39세인 그가 그해를 뒤돌아보며 녹음할 때 ‘10년인가 12년 전의’ 테이프를 들어본 감상을 말한다. 다른 작품에 자주 나오는 극 속의 극,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베케트적 구조가 여기에서는 거의 기계적인 정확함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시간’의 극복은 물론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행복했던 한 때를 지금 찾았다 해서 그 행복이 지금의 크라프에게 고스란히 전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좌절과 회한을 새삼스레 깨닫게 할 뿐이다. “나는 모든 시대를 돌리고 싶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강조했던 39세의 테이프가 침묵 속을 헛돌고 있는, 69세 노인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으로 막이 끝나는 것만큼 쓸쓸한 광경은 더 없으리라.
현대인의 비극적 삶의 모습 〈승부의 끝〉
〈승부의 끝〉은 1956년 집필하여 1957년 4월 런던에서 첫 상연한 뒤 같은 해 파리 미뉘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희곡은 형식과 주제적인 측면에서 베케트의 포스트모더니즘 극작기법과 문학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햄, 클로브, 클로브의 부모인 네그와 넬, 이 등장인물 네 명은 철저하게 무기력하고 나약하며 더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인생이라는 체스놀이의 막판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무의미한 행동의 반복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찾아보고자 하지만 실패한다. 그들의 언어는 꾸준히 되풀이되고 발음되지만 결국 진리를 전달하는 수단이라기보다 단순한 놀이의 또 다른 도구가 되고 만다. 그 반복적인 행동과 언어는 무기력하게 인생의 종말을 기다리는 것을 상징한다. 인생이라는 놀이의 막판에 처해 있는 현대인의 비극적 삶의 면모를 깊게 드러내고 있다.
베케트 단편의 정수! 〈첫사랑〉
베케트 단편소설에서 주목할 점은, 회상 형식으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서술자 ‘나’의 환상이다. 이는 모태 회귀, 거세, 유혹, 근원 장면 등으로 분류되는 원초적 환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베케트는 언어를 통해 결핍, 무지, 무능과 같은 부족함을 표현한다. 말하자면 한때 위풍당당했을 튼튼한 성벽과 같은 언어의 구조물이 베케트의 단편소설들에서 여기저기 망가지고 무너진 상태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첫사랑〉에서 끔찍할 만큼 가구들이 꽉꽉 들어찬 방을 본 내가 안락의자만 빼고 그 방의 가구들을 모두 복도로 내놨던 것처럼, 눈부신 다른 의미들은 모두 비우고 어렴풋하고 가느다란 한 줄기 빛과 같은 의미만을 언어의 구조물에 남겨둔 채로 말이다.
이러한 부족함은 순간 생각을 마비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지 일관성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수많은 생각과 고민의 장을 읽는 이에게 활짝 열어 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