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옷을 입은 무녀가
왼손에는 손가락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기둥을 가리키며 들어가라 하니
즐겁기 그지없도다.”
한국의 민간신앙을 연구하는 대학생들이
부산의 한 마을을 조사하다 위험에 빠진다
비밀스러운 제의가 이어져온 그 마을 곳곳에는
거대한 원한이 불러모은 요귀들이 포진해 있는데……!
오컬트 유행에 발맞춰 후속적으로 파생된 소설이 아니라, 일찍이 진정한 K-오컬트의 매력을 알리기 위해 완성되어 있던 작품이라는 점에서 『귀매』는 한국의 오컬트 소설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상을 지닌다. 세계관과 설정, 시공간적 배경이 폭넓으며 주제의식이 묵직한 울림을 주는 덕분에 특정한 시대나 세대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독자층이 즐길 수 있는 대형 다크 판타지가 펼쳐진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일제 치하 부산의 한 마을에서 벌어진 참극과 그로 인한 거대한 원한을 현대의 영능력자 대학생들이 해소해나간다는 줄거리를 통해, 『귀매』는 한국의 비극적인 역사를 되짚는 한편 개발지상주의와 황금만능주의에 의해 소실되어가는 전통문화에 대한 안타까움, 때로는 귀신보다 인간의 탐욕이 더 무섭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꼬집는다.
소설은 곧 사라질 마을 제의를 연구하기 위해 부산을 찾은 대학생들의 활기찬 에너지로 시작된다. 열렬한 개신교 신자이자 교회 집사이면서 전국의 굿판을 쫓아다니며 연구하는 독특한 캐릭터 ‘김재관 교수’의 주도하에 결성된 민속조사단은 대학원생 ‘혜린’과 ‘형섭’, 학부생 ‘성진’과 ‘유정’으로 이루어졌다.
혜린은 부산에 정착한 옛 친구 ‘민경’을 만나러 갔다가 괴이한 이야기를 듣는다. 혜린 일행이 앞으로 조사할 마을에서 자살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는데 그 죽음이 하나같이 끔찍하다는 것, 그리고 얼마 전부터 이 마을에 살기 시작한 민경 또한 자꾸만 자살하게 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민경은 귀신을 보는 능력을 지닌 혜린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혜린은 민경을 안심시킨다. 하지만 혜린에게도 마을을 뒤덮은 강한 요기妖氣가 느껴지고, 급기야 혜린은 민경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그 요기에 이끌려 성진을 차로 칠 뻔하기에 이른다.
차가운 기운이 핸들을 잡은 손에서 어깨까지 스쳐지나갔다. 혜린은 급히 핸들을 꺾으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이익!
(…) 이상한 느낌 때문에 차를 멈추지 않았다면 자동차는 그대로 성진을 치고 지나갔을 것이다.
‘이건 분명히 귀매야. 이렇게 강한 귀매는 처음 봐.’
혜린은 놀라서 멈춰 선 성진을 보며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26쪽)
민속조사에 호의적이던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조사단을 경계하며 취재를 거부하는 등, 이상한 일들이 계속되지만 조사는 예정대로 강행된다. 혜린과 성진은 마을 사람들 몰래 ‘도깨비 고사’를 취재하기 위해 한밤중에 산속으로 향한다. 도깨비 고사는 산에 사는 도깨비에게 바닷가로 내려와 부정한 기운을 쓸어내려서 마을에 풍요를 가져와달라고 비는 의식이다. 바닷가로 내려가려다 실패한 도깨비를 산길에서 맞닥뜨린 혜린은 마을에 몰려든 요물들이 도깨비의 정화 의식을 방해해 세력을 불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함께 있던 성진 또한 도깨비 같은 존재들을 볼 수 있는 영안靈眼을 지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깨비는 혜린과 성진에게 마을에 포진한 요귀들을 물리쳐줄 것을 호탕하게 부탁한 뒤 사라져버리고, 도깨비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해코지를 당하게 되기에 혜린과 성진은 힘을 합쳐 귀신들을 쫓아내기로 마음먹는다.
조사가 계속되면서, 조사단의 분위기 메이커를 맡던 형섭과 유정까지 영안이 없음에도 오싹한 초자연현상을 여러 차례 겪고, 조사단의 분위기는 한결 가라앉는다. 혜린 또한 마을에서 만나는 귀신을 물리칠 때마다 평소보다 강한 사념으로 뭉쳐 강력해진 요물들을 보며 불안감을 느낀다. 설상가상으로 친구 민경이 정말로 귀매에 홀려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되고, 민경의 죽음을 추적하던 혜린은 강한 영력을 지닌 존재의 원한이 마을의 귀매들을 조종해 비극적인 죽음을 일으키고 있음을 감지한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지…… 산 자의 두려움을 먹고 살아.
까르르 웃는 소리가 다시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차가운 바람이 훅 끼쳐와 성진과 혜린의 몸을 휘감았다.
“그게 뭔데?”
성진이 혜린의 귀에 대고 물었다. 혜린은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리며 나직이 답했다.
“귀매를 말하는 거야.”
혜린이 다시 고개를 바로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넌 왜 여기서 사람들을 죽이는 거지?”
나지막한 휘파람 소리가 웃음소리같이 귓가에 스쳐지나갔다.
(…)
-통제할 수 없는 나를 부른 자. 나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자가 사라졌어……
소리가 다시 멀어졌다. 혜린은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이고, 성진에게 말했다.
“이 마을에 강력한 귀매를 불러낸 주술사가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그 사람이 사라졌고, 귀매는 여전히 속박된 채로 마을을 휘젓게 된 거지.”(190~191쪽)
마을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이곳에 서린 깊은 원한의 정체를 밝혀내야 한다. 원한의 주인은 어떤 존재이고, 대체 과거에 이 마을에서는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게다가 형섭이 김재관 교수에게서 듣게 된 뒷이야기가 혜린 일행의 의혹을 한층 키운다. 이번 조사는 부산이 근거지인 재벌 가문으로부터 거액의 후원을 받아 진행되었는데 후원의 조건은 단 한 가지, 혜린과 성진을 조사에 참여시켜 이 마을로 데려오는 것이었다는 사실. 혜린과 성진이 이를 알게 된 순간, 기다렸다는 듯 후원자 ‘임재호’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난다. 임재호는 마을에 숨겨진 비밀을 추적할 단서를 제공하며 혜린과 성진이 마을을 구할 수 있도록 돕는 듯 보이지만, 어딘지 두 사람을 그 비밀의 실체로 유인하는 것만 같은 인상을 풍긴다.
“그럼, 혜린씨의 능력 기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재호는 혜린에게 슬며시 묵례를 하고, 그녀를 남겨둔 채 호텔로 걸어올라가기 시작했다. 혜린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혼잣말이라도 하듯이 말을 던졌다.
“근데 성진이는 왜?”
재호는 혜린의 말에 잠깐 걸음을 멈추고 대답을 망설이다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혜린씨에게나 우리에게나 도움이 될 테니까요.”
“도움?”
혜린이 양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되물었다.
“그렇죠. 그의 능력이 도움이 될 겁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또 그의 혈통도.”(167쪽)
그리고 임재호가 건네준 단서들을 바탕으로 조사를 계속한 끝에, 혜린 일행은 이 마을에서 치러지던 제의가 일제의 개입으로 잔인하게 변질되었고, 그 제의로 희생된 무녀의 깊은 원한이 일련의 사건을 일으킨 원흉이라는 것을 밝혀내는데……
“그런데 진짜 이상한 건 지금부터야.”
“그게 뭔데?”
“이 마을에서 신녀를 계승하는 방법이야.”
“그게 어떤데?”
혜린이 재촉하듯이 물었다.
“『황금가지』라는 책, 기억하고 있어?”
“제임스 프레이저? 영국 인류학자?”
혜린이 재빨리 대답했다. 형섭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노다 히로오는 거기 나온 일화를 인용하고 있거든. 숲의 왕 계승. 무슨 뜻인지 알겠니? 과거 여기서……”
“합의된 살인이 일어났다?”(262쪽)
그 잔인한 제의의 실체는 대체 무엇일까. 임재호와 그의 가문은 마을의 비극에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 것일까. 임재호는 혜린과 성진을 이 마을로 데려와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일까. 혜린과 성진은 도깨비의 부탁대로 요귀들로부터 마을을 구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스무 살 이공계 대학생이 생애 처음으로 구상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놀라워질 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없이 짜인 서사가 독자를 소설이 감춘 진실 속으로 이끌고 간다. 귀신을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듯 소름 끼치는 감각 묘사, 스릴 넘치는 조사와 추적, 한국의 무속 의식이 뿜어내는 신비로운 분위기, 비밀스럽게 이어져온 마을 제의에서 풍기는 오컬트 장르만의 오싹한 매력이 어우러진 장편소설 『귀매』는 K-오컬트 소설의 클래식으로 자리매김하며 귀중한 원형이 되어줄 것이다.
*문학동네 플레이 시리즈
‘읽는’ 소설에서 ‘보는’ 소설로
국내 최고의 작가들이 만들어나가는
무수한 취향의 테마파크!
흥미진진하고, 몰입감 높으며, 독자의 마음에 감동을 남기는
웰메이드 장편소설의 퍼레이드가 펼쳐집니다.
문학동네 플레이 시리즈는 ‘플레이(PLAY)’라는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소설 읽기를 ‘놀이’로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장르를 망라하는 문학 테마파크를 지향한다. 또한 한 장면 한 장면 허투루 쓰이지 않은 감각적이고 탄탄한 장편소설을 엄선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생’함으로써 오감을 통해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문학을 선보이고자 한다. 앞으로 문학동네 플레이 시리즈는 평단과 독자에게 인정받는 국내 최고의 작가들과 함께하며 재미와 감동을 함께 전하는 뛰어난 작품들로 채워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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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나서 처음 써본 이 『귀매』라는 소설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하며 그것이 더이상 박해받아서는 안 된다고 서투르게나마 표현하고 싶었다.
(…) 물론 여기 나오는 내용들 중 상당 부분은 실제가 아니다. 그러나 몇몇 대목은 실제 인명과 사건들을 그대로 혹은 약간 왜곡해서 써놓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에 나온 여러 이름과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약간 미안한 감도 있지만, 이름의 주인 대부분은 고인이고 여러 사건들 또한 세인들에게 잊혀져가는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어줍은 변명으로 그들에게 할 사과를 대신하고 싶다. _‘초판 작가의 말’ 중에서
머릿속에서 강렬하게 맴도는 이야기를 끄집어내 천대당하고 무시당하며 사라져가는 무속과 민간신앙을 말하고 싶었다. 나는 제일 익숙했던 공간, 그러니까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던 부산의 다대포를 배경으로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귀매』는 그렇게 아주 우연한 계기로 만들어진 소설이다. _‘개정판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