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크루지’, ‘드라큘라’,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등의 전통적 부르주아 대對 ‘노동하는 부르주아’, ‘부르주아는 길을 잃었다’, ‘부르주아는 주인을 필요로 한다’ 등의 부르주아. ‘노동하는 주인’이라고? 헤겔에 따르면 노예는 노동하고 주인은 향유한다. 하지만 「로빈슨 크루소」에 따르면 ‘원형적 부르주아’ 로빈슨은 천해고도에서도 땀을 흘리며, 매일 일기에 기록하며 노동하며, 부를 축적한다. 하지만 노예 ‘프라이데이’는 ……
‘근대의 서사시’부터 발상의 전환을 통해 기존의 주류의 지배 담론을 일거에 전복시켜온 모레티는 본서에서도 「공산당선언」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해져온 ‘부르주아 상’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킨다. 그의 면밀한 전복적 읽기에 따르면 근대의 부르주아는 오히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베버 상에 훨씬 더 가까우며, 이때의 베버는 ‘소설의 이론’의 루카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그는 그동안 인문사회학계의 정설과 통설을 뒤집고 물구나무 세운다.
문학과 역사 사이에서 즉 픽션과 논픽션 또는 허구와 실증 사이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보다 문학을 윗길로 보았지만 둘 간의 관계는 긴장과 논쟁의 일종의 DMZ를 이룬다. 둘 어느 쪽이 더 현실에 핍진하고, 현실에 대해 정확하게 증언할까? 그것은 다시 문학이란 무엇이고, 소설이란 무엇이며, 소설 형식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다시 하우저의 문학사회학이라는 소박한 형식이나 러시아형식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문학 형식과 역사의 관계를 묻는 방식이기도 하다!
■ ‘부르주아는 길을 잃었다’!......
19세기의 자본주의의 최전성기는 고딕 문화의 시대이다, ‘주인, 즉 부르주아는 노동한다’ 등 저자의 주요 테제는 ‘구두쇠 스크루지’, ‘드라큘라’,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로 대리-표상되어온 자본의 이미지와는 360도 다른 자본가, 즉 부르주아 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주인공은 인격화된 부르주아가 아니라 비인격화되고 탈인격화된 ‘자본’임을 말해준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개인의 행동에 대해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면서 그렇게 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자본주의에서 주체성은 전혀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탈인격화되고 비인격화된 자본만이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와 같은 자본을 하이데거는 ‘세계상’이라는 말로, 푸코는 ‘장치’라는 말로 주제화하는데, 모레티는 본서에서 문학 형식을 일종의 그와 같은 장치로 탐구하는 듯하며 그것은 부르주아가 자본에게 ‘패배해온’ 역사 기록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역사-문학-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우리 생각을 본서만큼 근본적으로 ‘탈구축하는’ 책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