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였던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기행문집 〈열하일기〉는 조선 후기 산문 문학의 백미로 평가받는 걸작이다.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에 조하사(朝賀使)로 파견되어 연행(燕行)을 다녀온 박지원이 자신의 여정과 견문을 기록한 일기체 기행문이다.
획기적 시각의 기행문
〈열하일기〉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실용주의적 태도와 개방적 세계관이다. 박지원은 청나라의 제도와 문물을 관찰하면서 단순히 이국적 풍경에 매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실리적 가치와 장단점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평가한다. 청나라의 우수한 문물과 제도는 과감히 수용하자는 박지원의 주장은, 성리학적 화이관(華夷觀)에 사로잡혀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조선 조정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예컨대 그는 청나라의 육로와 수로, 상업 시설, 화폐 및 도량형 제도, 장시(場市)와 시전(市廛) 등 경제 문물의 발달상을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묘사하며, 조선에서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당시 대부분의 연행록이 중화 문명에 대한 맹목적 동경이나 피상적인 이국 정취를 나열하는 데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획기적이다.
〈열하일기〉의 또 다른 특징은 생동감 넘치는 사실적 묘사와 해학적 문체이다. 박지원은 관찰자로서의 예리한 시선으로 중국인들의 일상적 삶과 생활상, 낯선 풍물과 인심을 사실적으로 포착해 낸다. 특히 시적 감수성과 해학이 넘치는 그의 필치는 현장감과 생동감을 더해 준다.
때로 저자 자신이 등장인물로 나서서 현지인들과 문답을 나누거나 에피소드를 연출하는 구성 또한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이는 단순한 견문 나열에 그치던 기존 기행문의 문법을 넘어, 기행문에 문학성과 서사성을 부여하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문체의 측면에서도 한문투의 딱딱함을 벗어나 구어체에 가까운 생생한 문장, 경쾌하고 해학적인 문체는 〈열하일기〉 특유의 매력을 만들어 낸다.
비판의식과 개혁 의지 넘쳐
내용의 측면에서 〈열하일기〉는 단순히 연행의 견문을 기록한 기행문에 그치지 않는다. 책에는 청나라에 대한 관찰과 비평은 물론, 조선의 현실에 대한 저자의 비판의식과 개혁 의지가 넘쳐흐른다. 중국을 직접 목도하고 돌아온 박지원은, 조선의 경직된 제도와 인습, 학문과 사상의 폐쇄성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책 곳곳에서 그는 조선의 기술과 문물이 청나라에 비해 얼마나 낙후되었는지를 개탄하며, 개방과 수용, 과감한 개혁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열하일기〉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박지원의 깊이 있는 사유가 곳곳에 녹아 있는 철학적 기행문이기도 하다. 여행 중에 목도한 자연의 풍경과 인간사의 만남은 저자로 하여금 인생의 무상함과 덧없음에 대해 숙고하게 하고,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과 본성에 대해 통찰을 이끌어낸다. "천하의 일이 모두 꿈과 같고 인생은 한바탕 꿈속에서 헤매는 것과 같다(天下事皆如一夢, 人生恍若一夢中)"라는 유명한 대목 등에서 박지원의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만날 수 있다.
이처럼 〈열하일기〉는 당대 연행록의 전형을 뛰어넘어, 박지원의 진취적 문명관과 실사구시적 세계관을 그려낸 새로운 형식의 기행문학이었다. 조선 후기 북학사상(北學思想)의 선구적 저작인 동시에, 개방과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 실학정신의 고전이기도 하다. 이후 연행록뿐 아니라 조선 후기 산문 문학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조선 지식인의 사유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도 〈열하일기〉의 의의는 크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열하일기〉가 주는 메시지 또한 결코 적지 않다. 변화하는 세계를 직시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자세, 학문과 사상의 틀에 안주하지 않고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실사구시의 정신, 인간 보편의 모습에 대한 통찰과 해학 어린 성찰은 시대를 초월해 되새길 만하다. 무엇보다 우리 안의 낡은 인식틀과 고정관념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세계와 소통하며 끊임없이 배우고자 했던 박지원의 자세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정 개방적이고 창조적인 사고, 세계와 인간을 꿰뚫어보는 혜안, 그리고 자신의 경험과 사유를 생생한 언어로 형상화해 내는 글쓰기의 힘. 〈열하일기〉는 이 모든 것이 빚어낸 독보적 걸작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 책과 동행하는 특별한 연행(燕行)을 떠나 보기를 권하고 싶다. 박지원이 걸었던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분명 또 다른 의미의 열하(熱河)를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