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라는 거대한 배를 움직이는 숨은 조타수, 드라마투르크
드라마투르기. 희곡작법이나 극작술, 혹은 희곡 연출법을 의미하는 용어로 한국 연극계에 도입된 지 20여 년이 가까운 시스템이지만, 여전히 생소한 개념이다. 우리에게 〈현자 나탄〉으로 유명한 독일의 극작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이 처음 사용하면서 알려진 이 개념은 수많은 연극 분석과 비평, 그리고 인문학적 논의를 토대로 독일 연극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레싱 자신이 독일 최초의 국립극장인 함부르크 국립극장의 드라마투르크를 맡아 101편의 드라마투르기 노트를 작성했고, 이 자료는 “왕좌 뒤의 권력”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독일 연극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최근 우리 연극계에서도 드라마투르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다양한 연극에 도입하는 추세이다. 그렇다면 드라마트루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인가. 손진책 연출가의 말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이번 〈햄릿〉 드라마트루기 작업은 연극을 만드는 과정의 좋은 전범典範이 되었다. 배우들이 많은 독서를 하고 스스로 참고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그런 방식은 현실적으로 제한이 있다. 이번 연극의 제작 과정에서는 드라마투르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배우는 자기 연기에 몰두하게 하고 드라마투르크가 인물에 관한 여러 자료와 캐릭터 분석을 풍부하게 제공해주면서, 배우들이 인물에 대해 갖는 의문들을 그때그때 질의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 과정은 배우들이 캐릭터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배우들의 연기가 더욱 단단해지는 기회가 되었다.
즉 드라마투르기는 작품의 시공간적 배경, 그리고 사회문화ㆍ역사적 배경이 망라된 자료를 분석, 제공함으로써 창작진이 캐릭터를 깊이 이해하여 새롭게 창조하고 체현해내는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이다. 저자는 무대에서는 배우가 관객을 이끌고 항해를 떠나는 항해사라고 표현했는데, 창작진이 연극이라는 거대한 배를 안전하게 띄우고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게 조타수의 역할을 맡는 것은 드라마투르크이다.
이 책의 작가 박철호는 다양한 언어와 역사, 문화, 예술에 폭넓은 지식을 펼쳐 보이며 〈햄릿〉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그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도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다. 이름 하나 허투루 넘어가지 않고 작품 속 캐릭터 형성에 미치는 다양한 가능성까지도 분석한다. 그리고 이런 작업을 통해 작품은 무한의 가능성을 품은 다채로운 연극으로 분화해간다.
원래 Q1 판본에 오필리어는 그리스식 이름인 Ophelia가 아니라 라틴어식 이름인 Ofelia로 되어 있다. 처음에 작가가 그녀를 어떤 캐릭터로 생각하고 썼는지를 보여준다. Ofelia는 O felia, 즉 O, filia! 를 연상시킨다. “오 내 딸아!”라는 뜻이다. 한데 Q2 판본부터는 이름이 그리스식으로 바뀐다. 그러면서 발음은 같지만 다른 의미가 추가된다. 그리스어에는 영어의 O 에 해당하는 모음이 ο와 ω두 개이다. 먼저 장모음인 오메가ω를 사용하면 (…) 영어의 help에 해당한다. 아버지를 돕는 오필리어일 수도, 외로운 햄릿에게 도움을 요청받는 오필리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단모음인 오미크론ο을 사용하면 (…) 의무duty 또는 복종obligation을 의미한다. 딸로서 동생으로서 복종하는 오필리어. 마지막으로 감탄사에 해당하는 ‘오!’를 떼어내면 우정과 사랑이란 뜻이 된다. 이때는 햄릿을 사랑하는 오필리어가 된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우리는 작품에서 이 모든 의미가 포함된 오필리어를 만나게 된다. _216~217쪽
그렇다고 〈햄릿〉의 명성이나 우리 앞에 놓인 지적 도전 앞에서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저자는 인물별, 주요 상황별로 장章을 나누어 우리가 새로운 정보들을 천천히 흡수하며 따라올 수 있게 안내한다. 그리고 연습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은 〈무대를 기다리며〉를 통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무대 뒤편의 모습, 공연이 탄생되는 현장을 보여준다. 몇 시간의 공연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붓는 노력과 그 과정에서 무수히 겪는 좌절과 희열, 결국에는 무수한 에너지들이 결합하여 무대에서 폭발하는 과정은 재미를 넘어 감동을 안겨준다.
유령 역의 전무송 배우가 노트를 읽고 한마디 한다.
“사백 년 동안 연옥에 갇혀 있었네! 이제 풀려나면 사백 년 만에 풀려나게 생겼어!”
팔순이 넘은 노배우가 대본을 외우느라 힘겨워하는 것을 보니 안쓰럽기 그지없다. 다 외웠다고 생각해도 어느 순간 깜박깜박한다. 그러곤 연출과 다른 배우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할 수 없다. 그게 배우의 숙명이다. (…) 괜히 찡해진다. 저렇게 농담을 던질 수 있는 계기가 된 노트를 쓰길 잘했다며 혼자서 내 영혼을 토닥토닥 달래본다._64쪽
400년간 공연되어왔고
인류가 연극을 하는 한 계속될 〈햄릿〉
《햄릿 스쿨》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햄릿〉이 훨씬 더 복잡다단하고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이 책을 읽어가면서 한때 어린아이들조차 장난스레 외치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라는 한 줄의 대사에 얼마나 다양한 고민과 내적 갈등이 내재되어 있는지, 왜 햄릿의 선왕 유령은 그토록 집요하게 아들에게 복수를 해달라고 요구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말을 빙빙 돌리는지, 왜 오필리어는 갑작스러워 보일 정도로 무너져내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저자는 단정적인 해석을 경계한다. 셰익스피어가 이 작품을 집필한 시기 영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가능한 여러 해석을 제시하되, 결국에는 작품의 최종 창작자인 연출가와 배우의 해석과 선택을 존중한다.
변명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For를 반복하면서 그 이유를 또 설명한다. 해석에 논란이 많은 부분인데, 내용을 보면 죽는 게 맞는 일이다. 하지만 마지막의 “한 자루 단검이면 끝낼 수 있는데” 부분이 문제다. 햄릿은 죽지 못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의 모욕을 받아가며 죽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죽지 않겠다는 말이다. 즉 스스로 그가 목숨을 끊으면 그런 모욕들을 받을 게 분명하니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_141쪽
〈햄릿〉은 처음 발표된 이래 400여 년 동안 세계 곳곳의 무대를 지켜왔다. 워낙 많이 만들어져 식상함을 느낄 법도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매번 새로운 기쁨과 감동에 사로잡힌다. 《햄릿 스쿨》은 세계 문학사상 최고의 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햄릿〉이 21세기 한국에서 새롭게 해석되는 방식과 과정을 담고 있다. 텅 빈 무대에서 우리에게 감동과 환희, 슬픔과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작품이 탄생하는 놀라운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배우들이 실제 무대에 오른 장면을 담은 공연 사진과 무대미술을 담당한 이태섭 교수의 무대 구상 스케치 등 풍부한 이미지 자료는 우리가 이야기를 따라오면서 상상하고 기대하던 것이 구현되는 순간들을 입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마치 연극이 끝난 후 현장에서 느낌 직한 여운을 남긴다.
**이어서
연기에 관심이 있거나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햄릿〉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수없이 읽어봤지만, 이번 작업을 통해 내가 알고 있던 지식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공부하고 싶은 〈햄릿〉의 진면목을 경험한 시간이었다. _백경우/레이날도 외
공연을 이어나가는 현재도 드라마투르기 노트들을 보며 연기에 대해 계속 공부하고 있다. 어렵고 험난했지만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여정을 떠올리며 무대에 서는 매 순간 더 나은 오필리어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_루나/오필리어
박철호 드라마트루크는 우리 연습의 일부였다. 연극에 대한 열정과 한결같은 자세는 오랫동안 연극을 해온 우리도 배워야 할 부분이다. 오래오래 연극을 지켜주시길! _손숙/배우 2
더 깊게, 그리고 더 자세히 햄릿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드라마투르기였다. 냉철한 학자처럼, 때로는 광기에 휩싸인 햄릿처럼 작품에 온 힘을 쏟는 드라마투르크의 모습에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었다. _이승주/햄릿
많은 연극학도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아주 의미 깊은 책이다. _전무송/햄릿 선왕
이 노트가 없었다면 이번 공연의 완성도가 이렇게 높을 수 있었을까. 연습하면서 알게 된 깊은 스토리가 캐릭터를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위대한 작품이 탄생하는 데 전문가들의 협업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중요성을 알려준 작업이었다. _정경순/배우 3
이번 공연의 완성도가 높은 것은 여러 스태프들의 각별한 노고 덕분이기도 하지만 특히 드라마트루크의 열정이 큰몫을 했다. 연극의 방향을 찾아가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시간이었다. _정동환/클로디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