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흔든 집단의사결정 시스템,
어전회의를 들여다보다
왕비의 침전이었던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의 동쪽에는 1910년 8월 22일 조선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던 흥복헌(興福軒)이라는 작은 전각이 있다. 당시 어전회의에는 국무 대신 외에 황족(皇族) 및 문무 원로의 대표자들이 참석해 한일합병조약에 대해 논의했는데, 여기서 이완용을 전권위원(全權委員)으로 임명하고 일본 통감과 협정하게 한다는 결정이 이루어졌고, 결국 1926년 4월 25일 이곳에서 순종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흥복헌은 제국의 종말을 맞은 장소가 되었다.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며 왕과 대신들이 치열하게 국정을 논의하던 조선의 어전회의는 그렇게 제국의 운명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간 우리 역사와 문화 콘텐츠를 꾸준히 발굴하고 소개해 온 김진섭 작가는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가를 만큼 절대적 의사결정 시스템으로 작동했던 조선의 어전회의에 주목했다. 작가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때부터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조선왕조실록》(〈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주관하여 편찬하였기에 일반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 포함하지 않는다)을 꼼꼼히 살펴, 어전회의에 나타난 다양한 의사결정 순간과 그 안에 담긴 함의(含意)를 논리적이면서도 차분한 필치로 풀어냈다.
정치에서 민생까지
어전회의에서 쏟아진 말, 말, 말
조선의 어전회의는 주로 왕에게 문안을 드리던 조회(朝會)·조참(朝參)·상참(常參) 등의 정례회의와 국정을 논하던 경연(經筵)·백관(百官)회의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어전회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경연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매일 두세 차례씩 실시했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경연은 국왕과 신하 간 교류와 소통의 기회이기도 했고, 경연의 성패가 백성들 삶에 영향을 미쳤다”라는 평가를 받는다.
회의에는 정승·판서를 비롯한 중신(重臣)과 대간(臺諫)·홍문관 등의 관원, 기록을 맡은 사관(史官) 등이 참석했는데, 작가는 이 책에서 조선왕조 500년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세종 같은 성군(聖君)에서 황희, 맹사성 등의 명재상들을 소환하여 그들이 어떻게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이루어내고 협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주제별로 구체적인 사례를 포함해 다루고 있다.
작가는 특히 첨예하게 의견이 갈렸던 사례들, 즉 개국 초기에 국정에 부담을 주는 천도를 강행하려던 태조와 이를 말리던 정도전 이야기(1394년), 왕의 인사권을 제한하는 서경 문제로 끝까지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은여림과 태종 이야기(1413년), 양반인 황효원이 노비의 딸을 적처로 삼은 문제를 두고 성종과 대신들이 대립한 이야기(1476년), 금주령을 위반하면 사형에 처했던 영조와 한마디 말로 영조의 마음을 돌렸다는 구상 이야기(1763년) 등 왕과 대신들이 며칠에서부터 해를 넘기면서까지 논의를 거듭하며 소통한 모습들을 섬세하게 펼쳐냈다. 물론 명나라 풍수지리가를 고집하며 그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던 선조 이야기(1594년) 등 불통의 사례도 빼놓지 않았다.
이외에 왕에게 사실을 보고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당대의 풍습이나 일반 백성의 삶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도 상당한데, 과거에 합격한 자라면 누구라도 처음 관직에 나갈 때 거쳐야 했던 "면신례"라는 악질적인(?) 신고식 이야기, 신분이 다른 남녀의 결혼이 조선의 3대 송사 중 하나인 노비 송사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 밤새도록 술을 파는 날밤집과 "목로"라는 나무 탁자를 두고 서서 간단히 마시는 선술집, 안주인은 얼굴을 내보이지 않고 팔뚝만 내밀어 술과 안주를 내준다는 팔뚝집 등이 등장할 만큼 주막(酒幕) 문화가 발달했다는 이야기 등이다. 그렇다면 어전회의에서 쏟아져 나온 왕과 대신, 사관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신 등의 말을 따르시길 바라나이다.”
_명나라 사신에게 거짓말을 한 이징옥의 죄목을 두고 고민하는 세종에게 재상 맹사성이 한 말
“풍수지리 등은 단순히 이치가 그렇다고 설명하는 것일 뿐 이를 이용하여 앞날을 예측하는 것은 전혀 믿을 것이 못 되며, 더구나 묘를 옮기는 일은 후손들의 복을 빌기 위함인데 왕이면 되었지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_풍수지리에 의존해 아버지 세종과 어머니 소헌왕후의 능을 옮기려던 세조에게 서거정이 답한 말
“…하찮은 소민(小民)은 겨우 한 번 술에 취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논박(論駁)당하고, 호화롭고 편안한 생활을 누리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없는데도 논박당하지 않는다면 이런 법은 시행하여도 이익이 없을 것이다.”
_금주령을 강화해야 한다는 김명중의 말에 세조가 금주령 시행에서 형평성과 공정성을 지적하며 한 말
“…(김왕에게) 죄준다고 한들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대신이란 자가, 어떤 아전이 사사로이 말했고 어떤 사람이 간여했다는 등의 말로 임금의 귀를 번거롭게 하면서 좀스럽다는 비난을 돌아보지 않았다. 아, 저 같은 대신에게 사리와 체면을 책임 지울 수 있겠는가?”
_권력자에게 잘 보이려 부정행위를 저지른 도사(都事) 김왕과 그를 비난하는 대신을 사관이 평가한 말
어전회의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는?
이 책에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사관들의 주관적 평가나 해석, 즉 사평(史評)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라 하겠다. 사관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잘잘못이나 인물에 대한 비평 그리고 기밀 사무 등을 직필(直筆)하였다. 특히 초고라 할 사초(史草)는 기록의 진실성과 독립성을 위해 왕조차 볼 수 없었는데, 이는 기록을 통해 왕을 통제하는 힘을 발휘했고 권력을 끊임없이 견제하며 감시하는 기능을 했다.
이러한 사관의 역할은 오늘날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언론의 기능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 조선왕조의 어전회의는 사라졌지만, 오늘날은 "시민이 기자"인 민주 세상인 만큼 개개인 모두가 사관처럼 감시의 눈을 가질 필요가 있다. 역사와 문화 콘텐츠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조선의 어전회의 속으로 흥미진진한 시간 여행을 떠나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