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등산학교는 등산에 대한 체계적 개념이 없던 1970년대 초반 설립되었다. 1974년 학원(사설강습소)으로 등록하기 위해 교육구청에 문의하자, “냄비 가지고 가서 밥 지어 먹고 오는 등산에도 교육이나 학교가 필요합니까?”라는 답변을 들었다는 시절이었다. 산악인들의 열의는 훨씬 높은 수준에 있었지만 히말라야 등반을 위한 동계훈련 중 조난사고로 원정대원 10명이 사망하는 사고(1969년)를 겪으며, 당시 국내 등반기술에 대한 한계를 절감하고 있을 때였다.
한국등산학교는 1974년 6월 15일 도봉산 기슭 도봉산장에서 첫 입교식을 가졌다. 대한민국 첫 상설 등산교육기관이 태어난 것이다. 50년 동안 정규반 100회, 암벽반 52회, 동계반 48회 졸업생을 배출했고, 경찰구조대, 119구조대, 특전사 특별반까지 폭넓고 깊이 있는 산악교육을 펼쳤다. 남북교류에도 힘써 2005년과 2007년 동계반 교육을 금강산에서 실시하고 이를 계기로 북한구급봉사대 산악교육에도 나설 수 있었다.
“정신력 체력의 단련으로 국방에 기여함과 국토애 및 애국심 앙양.” 학교의 설립목적 중 하나인 이 문구를 지금 보면 시대착오적이라 느낄지도 모른다. 당시 시대적(전후 20년), 사회적 상황(군사정권기)과 설립 과정의 어려움이 읽혀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비장하기까지 한 순수함과 강인함으로 50년 동안 이뤄낸 것이 참 많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였다. 워낙 위험한 사고 현장이라 중장비를 쓰지 못하고, 인력만으로 로프를 묶어 무너진 건축물 잔해를 끌어올려야 하는 급박하고 험한 상황이었다.
“쏟아진 철근을 들어내야 사람도 구하고 시신도 찾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로프를 에반스매듭(일명 교수인매듭)으로 해서 사용하니 다시 풀지 못하고 칼을 찾아 자르고 로프를 새로 구해야 하는 등 어려워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다시 풀어 쓰기 좋은 클로브히치 매듭을 가르치며 사고현장을 누볐어요.” 당시 한국등산학교 강사였던 서성식의 재난구조 활동이 한국 소방구조대 창설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 최초의 여성 등산교육을 시작한 것은 물론이다. 여성으로 구성된 최초의 해외 원정대도 한국등산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되었다. 등산의 체계화와 학술화를 위해 1980년대에 발간한 〈산학〉도 빼놓을 수 없는 학교의 업적 중 하나다. 한국등산학교 동문회에서 5회에 걸쳐 연재한 ‘전국 암벽 그레이드 조사’는 한국 암벽에 맞는 등반 난이도 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난이도 체계는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며 산악인들에게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한국등산학교 50년〉을 보면 학교의 50년 세월만이 아니라 한국 등산 50년을 돌아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