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히로시와 탐험대원, 곤티키호를 타고 북극해로 출항하다
2012년 6월 19일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제도 롱위에아르뷔엔 항구. 7월 17일까지 백야 기간 약 한 달 동안 생태 사진작가, 그림책 작가, 은퇴한 신문기자와 박물학자, 생태 해설사, 카메라맨과 영상 감독 등 일본 대원 8명과 베테랑 승무원 3명이 탄 배 ‘곤티키호’가 북극해를 탐험하러 출항한다.
요트의 진짜 이름은 ‘조너선 4호’이다. 그런데 아베 히로시는 왜 ‘곤티키호’라는 별명을 붙였을까? 1947년 노르웨이의 인류학자 토르 헤위에르위달이 돛대와 선실이 있는 대형 뗏목 ‘곤티키호’를 타고 페루에서 출항하여 태평양 폴리네시아 군도에 닿는 항해를 했다. 고대인들이 뗏목을 타고 이주했을 것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한 항해였다. 이 이야기에 깊은 감동을 받아 오랫동안 고대한 북극해 탐험 여행을 할 요트에 곤티키호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책 『아베 히로시의 북극 그림 여행기』의 원서 제목은 『곤티키호의 북극 탐험』이다.
아베 히로시 일행은 스발바르 제도 중 가장 큰 섬인 스피츠베르겐섬 롱위에아르뷔엔 항구에서 요트를 타고 출발하여 섬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여행을 시작한다. 요트 안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만나는 작은 섬에 상륙하여 둘러보며 동물과 식물들을 관찰하는 진짜 탐험이다. 특히 야생 북극곰은 위험해서 승무원 중 한 명이 항상 총을 메고 동행한다. 다행히 총을 쏠 일도 지루할 틈도 없는 북극해의 동물들과 장엄한 자연이 이들 앞에 펼쳐진다. 이 책은 그 매일매일의 일들을 빼어난 그림과 글로 기록한 여행 일기이다.
북극해에서 만나는 경이로운 생명들의 약동
『아베 히로시의 북극 그림 여행기』에는 아베 히로시가 만난 온갖 동물들이 생생한 그림들과 함께 매 페이지 등장한다. 북극곰, 북극여우, 순록과 흰뺨기러기, 뿔퍼핀, 아비, 큰부리바다오리, 참솜깃오리, 긴턱수염물범, 벨루가, 고리무늬물범 등 육지에서 하늘에서 바다속까지 북극해는 생물들로 가득하다.
북극해에서 만난 북극곰은 동물원의 북극곰과 다르다. 덩치도 다르고, 움직임에서도 야생의 매력이 살아 있다. 그래서 “자유라는 것은 곡선적이고 변화무쌍한 행동”이라고 강조한다. 사냥하려고 온종일 얼음 구멍 앞에 웅크려 물범을 기다리고, 곧잘 실패하며 간신히 물범 사냥에 성공해도 더 커다란 북극곰에게 빼앗기기도 한다. 힘과 덩치에서 북극해의 어떤 동물도 맞설 수 없는 최상위 포식자 북극곰에게도 이 험난한 곳에서의 생활은 녹록하지 않다. 어미 곰은 북극해의 차가운 물 속에서 썩지 않고 몇 년이나 보관된 고래 사체에서 고기를 한 점씩 뜯어와 새끼 곰을 키운다. 이런 고됨을 관찰했기에 아베 히로시와 동료들은 북극곰이 얼굴 가득 피칠을 하고 사냥한 물범을 살육해도 잔인하다고 하지 않고 조용히 사냥 성공을 축하한다.
이 책에서 북극곰만큼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 새이다. 수백만 마리의 철새가 북극해 근처로 날아와 알을 낳고 번식하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거대 암벽에서 만난 큰부리바다오리 무리다. 60만 마리나 되는 큰부리바다오리 무리가 하나의 암벽에 빽빽하게 모여들어 서로 교차하며 날고 큰 소리로 울어 대는 장면은 장관이다. 큰부리바다오리떼가 삼각형으로 날아 거대한 암벽에 앉는 장면까지 저자가 느낀 충격과 떨림이 책의 글과 그림으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작가가 북극에 대해 갖고 있던 외로운 이미지를 단숨에 깬다. 북극이 압도적일 정도로 생명이 약동하는 장소라는 걸 깨달을 거라고 저자가 자신 있게 말하는 이유이다.
북극해에서 벌어진 인간과 동물들의 역사
북극곰, 철새와 더불어 북극의 또 다른 대표 동물은 바로 거대한 고래다. 북극해에는 플랑크톤과 작은 물고기가 풍부해서 고래가 살기 좋다. 고래는 몸에 지방을 대량 축적하고 있어서, 석유를 사용하기 전 인간은 고래 지방을 이용해 양초, 램프 기름, 비누, 잉크, 기계유, 화장품 같은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었다. 고래의 위상이 요즘의 석유의 위상과 비슷했다고 할까, 당시에는 고래가 세계 경제의 주역이었던 것이다. 17세기에는 스피츠베르겐섬에 세계 최초의 고래잡이 기지가 세워졌다. 수많은 고래가 무차별적으로 학살되고, 북극해의 바다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고래에게는 악몽 같은 역사다.
스발바르 제도는 노르웨이,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고래잡이 경쟁을 치열하게 벌였던 곳이다. 1663년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전쟁을 벌여 수십 명이 다치고 죽었다. 이 사건을 묘비와 십자가를 세워 기억하고 있다. 이제 잔인한 고래잡이는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북극해 곳곳에는 당시의 기억을 간직한 고래잡이 기지의 흔적이 유물로 남아 있다. 여행의 출발지이자 도착지인 롱위에아르뷔엔은 오래된 탄광 마을이기도 하다.
최근 몇 년 동안 북극의 해빙이 녹으면서 동물들이 점점 사라지고 북극곰들이 굶주림을 겪고 있다는 사진과 연구 결과가 연달아 발표됐다. 앞으로 더 기온이 올라가면 이들은, 그리고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 책을 읽다 보면 인간과 동, 식물이 맺어 온 관계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저자가 “북극곰도 갈매기도 나도 지구의 주인이다”라고 책을 마무리한 이유일 것이다.
신기한 요트 생활, 유쾌 발랄 승무원들 이야기
대원과 승무원 11명이 한 달을 보내기엔 좁은 요트에서 생활하며 겪은 에피소드들도 유쾌하고 즐겁다. 먼저 책에서 여러 번이나 등장하는 화장실 이야기. 요트가 흔들리기 때문에 화장실에서 변기를 이용할 때 무조건 ‘앉아’야 한다. 예외가 없다. 네덜란드인 선장은 “화장실에선 앉아서 볼일을 봐!”라는 잔소리를 달고 다닌다. 실수로 주변에 튀면 선장에게 불호령을 듣는다.
매일 하는 샤워와 세탁도 북극에서는 다르다. 매서운 추위 덕분에 땀이 나지 않기 때문에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고, 옷도 더러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샤워도, 세탁도 필요 없다. 게을러져서가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부패균이고 감기균이고 추위 앞에서는 맥을 펴지 못한다. 그래서 북극해를 오랫동안 탐험하면서도 대원들은 감기 한번 걸리지 않는다.
싸구려 포충망으로 플랑크톤 포획기를 만들고 다시마로 술안주를 만드는 대원, 미인인 주방장 곁에 있고 싶어 설거지를 자처하는 대원 등 대원들의 개성이 뚜렷한 것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저자의 글과 그림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위트와 유머가 넘친다. 곤티키호에는 전화도 라디오도 없어 마감을 재촉하는 일본의 편집자로부터 자유라고 하고, 긴턱수염물범의 곱슬곱슬한 턱수염을 잡아당겨 보고 싶다며 ‘돌돌 탁’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고, 폭풍우를 헤쳐 나온 뒤에는 ‘우린 뱃멀미로 변기를 보듬어 안는 친구들이다’라는 시를 쓰는 식이다. 자연과 동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 특유의 기발하면서도 애정 어린 시선에 절로 웃음이 나고 마음이 따스해진다. 삶과 자연, 생명에 대한 성찰이 담긴 이 책은 새롭고 즐거운 북극해 여행을 경험하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