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여성, 젠더, 섹슈얼리티, 혼인과 가족
현대 한국 사회 여성 관련 이슈들의 근본 토대 구축 - 개항기
현대 한국 사회의 첨예한 문제이자 갈등 이슈로 부상하고 있는 저출생 문제나 돌봄 위기, 또 젠더 갈등 등의 주제는 그 밑바탕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 및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정당한 평가 등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이전에 비해 상당한 정도로 개선이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한국 사회의 성평등 지수는 여전히 세계 하위권을 맴돌고 있으며, 이 문제를 둘러싼 인식의 차이로 말미암은 사회적 갈등도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한국 사회에 ‘여권(女權)’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는 19세기 중엽, 근대 개항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점에서 보면, 다른 제3세계 국가 또는 서구에 비해서도 한국 사회 여성의 권익 문제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항기를 거치며 조선 내외의 위기가 중폭되고 중복되는 한편, 개화 및 개화가 서구화로 치환되면서 한국의 여성 사회와 전통 문화는 계몽과 구습 타파 일변도의 대상으로 자리매김 되어 갔다. 오늘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라도, 근대 사회 한국 여성 문제를 그 기원에서부터 탐구하고 논의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한성순보》(1883) 같은 신문에서 이미 미국의 여성 가운데 신문사를 경영하는 사례를 소개하며 여성 주체성의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문제화하였다. 이는 여성의 지위나 역할 향상을 사회적으로 촉구하기 위한 글이면서, 서구 사회 번영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이 활발한 것을 그 한 이유로 꼽은 것을 의미한다. 반면, 서양 선교사들은 조선 여성의 처지를 억압받는 측면 일변도로 묘사하여 전통과의 단절에만 주력하고, 여성을 구제의 대상으로만 설정함으로써 전통의 비판적 계승 없이 서구 문화의 이식에만 열을 올렸다.
그림자에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가족 살림의 주체로서 재발견하다
이러한 현상은 개항기 유교 지식인들의 상반된 태도와 관련된다. 즉 보수적 유학자들은 서구의 남녀 구별 없는 문화를 바라보며, 남녀 역할 구분을 엄격히 하는 유교 문화의 훼손과 그로 말미암은 사회 붕괴를 염려하며 그 원칙을 더욱 강화하려고 했다. 반면 개신 유학자들은 남녀유별의 원칙을 새로운 사회적 요구에 맞춰 변형시키고자 하였으며, 여성 사회 내부에서도 신분 질서보다는 능력과 역할에 대한 구분과 재발견을 시도하고, 특히 ‘주체로서의 여성’을 발굴하고 조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두 입장 사이의 길항 작용을 거듭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여성 문화의 도덕적 재구성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특히 ‘열녀’로서만 주로 호명되는 여성이 가족적 정의 실현(부친의 원수 갚음 등)을 위한 복수의 주역, 위국의 주역(영웅적 여성), 치산(治産)의 능력자로서도 호명되었고, 양반 여성뿐만이 아니라 기층 여성들 또한 이러한 부면에서의 주체로서는 거의 차별 없이 주목되었다.
성(性)적 주체성을 인정하고, 며느리, 아내, 딸의 존재를 재발견하다
여성의 성 담론 역시 보수적으로 더욱 강화하려는 흐름과 여성의 성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흐름이 분기되어 나갔다. 오로지 후손 생산의 수단으로서만 인정되던 여성의 성이 국가의 동량(棟樑)을 생산하는 역할로서 조명되면서 조혼(早婚) 폐지가 공론화되었고, 또한 오랫동안 여성들의 삶을 옥죄던 개가 문제, 은연중 혹은 노골적으로 열녀를 지향하고 권장하는 사회 분위기에도 균열이 생겨났다. 가부장적 가족 제도 역시 개화기, 개항기의 변화 흐름을 비껴가지 못하였다. 유교 가족은 금방 와해되지는 않았으나 새로운 가족 제도에게 조금씩 그 지분을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교적 가족이 가족 내에서의 위계적 계보를 핵심 축으로 하였다면 새로운 가족 제도는 가족 내에서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며느리, 아내, 딸에 주목하는 한편, 건강한 국가를 위한 토대로서의 건강한 가족(인종)의 생산자로서 가족의 역할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접하면서, 절대적인 지식, 도덕 체계로 군림하던 유교도 서학이나 서구의 근대문물과 과학 등과 비교되었고, 그 절대성이 와해되는 것은 물론, 새로운 변화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