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도가 서 있는 곳에는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계율이 있었다. 소도 옆에는 반드시 경당을 세워 미혼의 자제들에게 책읽기, 활쏘기, 예절, 노래, 주먹치기와 칼쓰기 등을 가르쳤다.”
- 단군고기, 태백일사 참조
이 기록은 고조선 이래 어어져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무인 교육 풍습이다. 이후 조선시대에 무과제도가 정착됨에 따라 무예 문화는 우리 민족의 대중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러한 무예 전통은 우리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그 위용를 떨쳤으며, 또한 간고한 역경(逆境)을 죽음을 무릅쓰고 헤쳐왔기 때문에 그 고비마다 구구절절한 한(恨)이 서려 있다. 필자는 그러한 조선 무인의 긍지와 한의 역사를 충주 무학당 석비에서부터 찾아 나서서 그 역사의 날줄과 씨줄을 새롭게 다듬어 내었다.
“940년 고려 태조 왕건으로부터 ‘충주’라는 지명을 하사받고, 그로부터 313년이 지난 1253년 충주성 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승리하여 몽고군을 물리친 충주, 그 339년 후인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또 다시 3천여 목숨을 받쳐 죽음으로써 항쟁하였고, 그로부터 121년이 흐르고 나서야 1713년 무학당이 설립되자 역사에 맺힌 원한을 180년 동안이나 가등청정의 허수아비를 베면서 설욕하고자 했건만, 1894년 동학혁명 시기에 일본군에 초멸을 당하여 박제가 된 채 20세기를 맞이한 충주, 그로부터 또 130년이 흘러 역사의 시계는 어느덧 21세기를 가리키고 있건만 충주에서 그 박제가 깨어나는 울음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역사를 지켜온 사람들은 결코 그 역사를 잊지 않는다. 충주 동학군 대장 성두환(成斗煥)의 영혼이 ‘북두칠성의 별빛’이 되어 여전히 반짝거리며 흐르고 있는 충주 역사에 서린 한을 미미한 개인의 힘으로 어찌 달랠 수 있으리오마는, 필자 임재선은 그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만으로도 미력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으면서 이 책을 마무리짓는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맺힌 한을 일깨우고 달래고자 하는 이러한 필자의 소망은 1920년 소설가 이상의 자각과 역사의식에 닿아 있다. 직설적으로 진실을 말하기 어려웠던 1920년대에 소설가 이상은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나요”라고 묻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그 박제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속에 시대 상황을 담고 마침내 박제의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아 다시 예전의 천재로 깨어나게 하려는 소망을 담은 소설 ‘날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박제가 된 천재는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필자는 그러한 박제가 된 천재의 운명을 조선 무인의 운명에서 재발견하고 그 긍지와 한으로 되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