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詞)는 당대 중엽에 발생해서 송대에 유행하다가 송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장르다. 사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당연히 시(운문)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사를 시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사와 시는 표현하는 내용과 사용 어휘도 다르다. 게다가 사는 대부분 악곡에 맞춰 노래하기 위한 가사로 지어졌다는 점이 시와 비교해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는 이처럼 시와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모든 문학 장르와 마찬가지로 사 또한 민간에서 발생했다. 위진 남북조 이래 이민족과의 접촉이 빈번해지자 갖가지 경로를 통해 흘러 들어온 서역(西域)의 음악과 내륙의 민간 가곡이 결합하면서 신흥 속악이 생겨났다. 일반인들은 이 신흥 속악에 맞추어 노래 부르기 시작했고, 그 노랫말이 바로 사다. 성당(盛唐) 시기에 접어들면서 사회가 안정되자 민간에서 대량의 사가 쏟아져 나왔고 유명 문인들도 이 신흥 장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악곡의 가사용으로 창작되던 사라는 신흥 문학 형식은 만당 시기에 이르러 더욱 발전해 정식 문학 장르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오대십국 시대에는 이욱과 같은 황제마저도 사작(詞作)에 전념하는 등 사가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 장르가 되었다.
이욱이 즉위하기 전부터도 남당의 국력은 이미 기울어 있었다. 그의 아버지 중주 때에도 후주(後周)의 강공 전략 앞에서 후주의 명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북송 건립 후에 중주는 남당의 수도를 강서성 남창(南昌)으로 옮기고 금릉에는 태자인 이욱만 남겨 놓았다. 그리고 몇 달 뒤 중주가 병사하고 이욱이 25세의 나이에 남당의 군주가 되었다.
이욱은 문장뿐 아니라 서예와 음악과 그림에도 뛰어났다. 그래서 그는 황제 이전에 문인이었고, 문인 중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훌륭한 사인이었다. 불행이라면 이런 그가 황제가 된 것이다. 문인의 감정과 시각으로 위기에 빠진 조국, 소용돌이치는 강대국과의 대치 국면을 헤쳐 나가는 것은 불가능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신앙으로 불경을 낭송하고, 취미 활동으로 사를 짓고, 여흥으로 연회와 가무를 즐기며 취생몽사하듯 살아가면서 송나라가 와서 남당을 거두어 줄 날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욱의 부친이었던 중주 이경 또한 훌륭한 사인이었다. 게다가 대신들 중에는 시사의 대가였던 풍연사(馮延巳)도 있었다. 이런 남당의 문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욱은 당시만 해도 신흥 문학 장르였던 사의 새로운 경계를 열었다. 이욱에 대한 일화로 빠지지 않고 회자되는 것은, 조광윤의 군대가 금릉을 포위하고 있을 때에도 “櫻桃落盡春歸去”로 시작하는 〈임강선〉의 사구를 놓고 고민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 사를 다 짓기도 전에 송의 군대가 금릉을 함락해 그는 포로의 신분으로 변경[汴京: 개봉(開封)]으로 압송되었고, 변경에서 이 사의 마지막 세 구절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욱의 사풍은 송의 포로가 되어 변경으로 끌려가던 975년을 전후로 확연하게 나뉜다. 그래서 이욱의 사는 대체로 전기와 후기 두 단계로 구분한다. 전기는 중국 최초의 사집으로 후촉(後蜀)의 조숭조(趙崇祚)가 편찬한 〈〈화간집(花間集)〉〉의 사풍을 그대로 답습해 궁궐의 호화로운 생활과 극도의 우수를 담아내던 시기였다. 그리고 후기는 송의 포로가 되어 생활하던 시기로, 이 시기의 사가 예술적으로나 후세에 대한 영향력 면에서 가장 뛰어나다. “春花秋月何時了”로 시작하는 〈우미인〉, “簾外雨潺潺”으로 시작하는 〈낭도사〉, “四十年來家國”으로 시작하는 〈파진자〉는 지금까지도 애송되는 천하의 절창이다. 특히 〈우미인〉은 덩리쥔(鄧麗君)이 〈근심이 얼마나 많으신지요?(幾多愁)〉라는 제목으로 노래함으로써 현대인의 열렬한 사랑을 받기도 했다. 이 후기의 사풍은 소식(蘇軾)과 신기질(辛棄疾) 등의 호방파 사풍을 선도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욱의 사는 〈〈인간사화(人間詞話)〉〉에서 왕국유(王國維)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 후주에 이르러서 사의 경계가 확대되고 느낌이 깊어졌다”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