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는 12세기 전반의 고려가 불규칙한 기후변동으로 인한 기후위기에 시달렸고, 반복적 자연재해의 발생은 인간의 생산활동과 수명, 지배 세력의 역할 및 위상, 사회구성 측면에도 변동을 초래하였음을 밝혔다. 이에 재해 피해사 또는 재해 극복사가 아닌 재해 구성사라는 새로운 연구방법의 모색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채웅석은 10~19세기의 한ㆍ중 자료를 검토하여 작물에 피해를 주는 황충 및 황재에 대한 전근대 한국인의 인식과 대응을 고찰하였다. 천인감응론의 영향력이 컸던 시기에는 황재를 인사의 잘못에 대한 하늘의 견책으로 보아 모사모응식으로 해석하고 대응하였다. 성리학 도입 이후에는 재이의 발생이 천의(天意)가 아닌 천리(天理)의 어긋남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천인감응론에 따른 황재 대책은 군주의 공구수성 방식이 중심이었다. 사상ㆍ종교의 다원성이 두드러졌던 고려시대에는 사제ㆍ포제와 함께 각종 도량과 재초를 많이 설행하였으나, 조선건국 이후에는 불교ㆍ도교식의 기양 의례를 축소하는 한편, 황충을 잡아 없애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였다.
최봉준은 고려의 재이론은 대체로 유교정치 이념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했으나 고려가 수용한 중국 재이론은 참위설 등 유학 이외의 사상도 받아들이면서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 고려의 재이는 주로 국왕의 절대적 권위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활용되었으며, 신이ㆍ점사ㆍ점서 등이 폭넓게 동원되었다. 유학자가 작성한 재이 관련 의례 시문에는 유학ㆍ불교ㆍ도교ㆍ민간신앙이 상호 교섭하면서 공존했던 당대의 역사상이 반영되었다.
이정호는 「고려사」 오행지의 기사를 자연재해와 이변현상으로 구분하여 분석함으로써 고려전기 이변현상의 의미를 검토하였다. 자연재해보다 이변 기록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시기는 왕조 개창, 왕위계승과정의 갈등, 이자겸의 난 등 커다란 정치ㆍ사회적 변동이 뒤따른 시기였다. 자연재해, 이변현상, 위기인식, 정치ㆍ사회적 변동 등이 잇따른 것은 당시의 재이관에 말미암은 것으로 여겨진다.
2부에서 신안식은 「고려사」ㆍ「송사」ㆍ「요사」ㆍ「금사」ㆍ「원사」등에서 추출한 한재(旱災) 관련 용어를 비교ㆍ분석하고, 고려시대의 용례를 검토하였다. 아울러 중국 측 자료를 활용ㆍ보완함으로써 고려시대 가뭄의 발생 추이와 그 영향에 대한 보다 진전된 이해를 추구하였다.
이승민은 고려의 기우제는 정규 의례와 가뭄에 대응한 비정규 의례로 구분되며, 정규적 기우제는 가뭄에 비를 구함이 아니라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기후를 기원하며 시행한 의례임을 밝혔다. 고려에서는 성종대 국가 제사 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우사가 정규 의례로서 제정되었는데, 상당수는 4~5월에 걸쳐 시행된 재우(再雩)였다. 봄에 가물고 여름에 비가 내리는 한반도의 기후 때문에, 봄이 끝나가고 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에 지내는 우사는 그 효과를 경험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기우제였다.
최봉준은 고려-조선의 용신신앙과 관련되는 기우제는 토룡과 화룡을 활용하는 상룡기우, 도롱뇽이나 도마뱀을 이용하는 대룡기우, 침호두와 같은 잠룡기우로 구성되었는데, 고려의 기우제는 용신신앙에서 보듯 민간신앙적 전통이 매우 강했음을 밝혔다.
이승민은 겨울에 눈이 오지 않는 것을 재해라고 여기고 올리는 제례인 기설제의 성립배경과 구성에 대해 밝혔다. 동아시아는 10세기부터 온난하고 건조한 기후로 변화하면서 따뜻한 겨울이 지속되면서, 이듬해 병충해와 작물의 흉작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에 기설제를 불교나 도교 혹은 천상(川上)과 종묘 등 여러 장소에서 거행했지만, 겨울 기후가 정상화된 14세기 이후에는 기설제의 시행이 중지되었다고 보았다.
이상의 글들은 각기 다른 주제와 시기의 사례를 가지고 연구되었지만 전근대 재이 인식의 단면을 제시하기에 충분하다. 아울러 이러한 사고에서 파생된 재이 대책의 특징과 변화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재해 관련 연구는 천문학ㆍ기상학ㆍ지질학ㆍ생태학 등 자연과학의 영역에 걸쳐 있는 만큼, 학제 간 교류를 통해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우리 사회에 기후와 환경의 변화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제공함으로써 신진 연구자뿐 아니라 대중적 관심도 환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