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일본사람으로서, 헐벗고 굶주리는 조선사람들을 동정하여 때로는 문필로, 때로는 법정 변론으로 조선사람을 도우려다가 대세에 밀려 왕따가 된 사람들은 더러 알고 있다.
그러나 다쿠미처럼 스스로 조선사람이 되어 조선 사람과 애환을 같이 하다가 이 나라 흙이 된 사람은 몇이나 될까.
다쿠미가 3,000미터에 가까운 야쓰가다께 산록에 자리 잡은 야마나시현 카부또 마을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것이 1891년, 산림기사가 되어 조선에 건너온 것은 한일합병 직후인 1914년, 나이 23살의 새파란 청년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산이라 하면 으레 녹색은 거의 볼 수가 없고, 돌무더기만 노출되어 있는 적갈색(다쿠미의 표현에 따르면 적다색赤茶色)의 민둥산이었던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수백 년에 걸친 부패한 정치와 끊임없는 외침에다가, 당시까지만 해도 임야에 대한 지적공부도, 소유권도 확립되지 못해, 대부분의 산은 이른바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기 때문이다.
이 처참한 산 색깔에 마음이 아픈 그는 이 산들을 다시 녹색으로 바꾸는데 자신의 잎 평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 해서 전국의 산들을 두루 돌아보고, 각 그 산들에 맞는 수종을 고르고, 그 잣나무 씨를 채집하여 노천발아에 성공함으로써(그 노천발아에 대한 그의 논문은 세계 임업잡지에 게재되어, 지금도 미국에서는 그 방식을 따르고 있다고 함) 그의 생전에 이 나라 산들은 어느 정도 녹색을 회복했던 것 같다.
이렇게 다쿠미는 이 나라 산천을 사랑하다 보니, 이 나라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그 문화유물인 도자기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 귀족들의 수집 취미를 만족시키기 위한 청자는 알아도(당시까지 조선에는 도자기 수집 취미가 없었던 듯) 백자는 도자기 취급도 안 했던 시절에 백자의 그 담백하면서도 따뜻한 자태에 매료된다.
1913년 한국 도자기의 신이라 일컫는 아사카와 노리타카의 동생 아사카와 다쿠미는 1914년 5월에서 1931년 4월 2일까지 17년 동안 한국 임업시험소 고원과 기수로서 국립산림과학원과 국립수목원의 이사, 설계, 식재, 관리 등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대한민국 인공림의 37%를 차지한 잣나무를 씨앗 틔운 "노천매장법"을 발명하고, 쓰면 쓸수록 조형미, 실용성, 예술성 등이 빛나는 한국의 소반에 대하여 〈조선의 밥상〉 이라는 책도 펴냈다(1929년)
조선의 도요지 700여 곳을 답사하고 도자기 명칭, 용기 등을 그림으로 남기고 이름을 적은 유작 〈조선의 도자명고〉(1932년)를 발간하여 도자기업계으 중시조로 여겨진다.
1920년대 달항아리 백자대호의 예술성을 야나기 무네요시와 두 형제가 밝히어 영국 왕실에서 인도 무역상을 통해 사들여 전시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국의 미를 "이별의 미", "한의 미"라 하였으나, 두 형제는 도요지를 돌면서 굿, 연희 등을 통해 한국의 미는 "멋, 흥취, 가락"이라 말했다.
1924년 지금의 중앙국립박물관 민속박물관 전신인 〈조선민족미술관〉을 경복궁 집경당에 건립했다.
조선인보다 더 조선인으로 살다가 식목일 준비 과로 급성 폐렴으로 40세에 생을 마쳤다.
그의 생애가 〈인간의 가치〉라는 제목으로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15년 실렸고, 그의 고향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초등학교 교재로 일대기 만화가 교재로 작년부터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