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청중이 하나 되는 공간, 판소리
판으로 열고 소리로 그리다
2003년 11월 7일 유네스코는 우리나라의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를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언했다. 한국의 전통문화로는 2001년 5월에 선정된 종묘 제례 및 종묘 제례요에 이어 두 번째다.
‘판소리’는 ‘판’과 ‘소리’의 합성어로, ‘여러 사람이 모인 곳’ 또는 ‘상황과 장면’을, ‘소리’는 ‘음악’을 뜻한다. 즉 ‘많은 청중이 모인 놀이판에서 부르는 노래’로,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의 장단에 맞추어 소리(창), 아니리(말), 너름새(몸짓)를 섞어가며 구연(口演)하는 일종의 솔로 오페라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판소리의 내용에 익숙하다. 판소리의 뼈대를 이루는 이야기는 우리 민족 내부에서 오랜 세월 동안 전승되어 온 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수궁가〉(토별가)의 기본이 되는 ‘토끼와 자라 이야기’는 《삼국사기》 〈김춘추조〉에 실려 있으며, 〈심청가〉의 기본이 되는 효행에 관한 이야기는 곳곳에 전해지고 있다. 〈춘향가〉의 열녀나 암행어사 이야기 또한 ‘옛날이야기’ 형태로 흔히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라면 판소리의 줄거리는 작품을 읽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으며, 우리 민족의 정서와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특히 판소리는 문학, 음악, 연극의 요소를 모두 갖춘 예술이자 이들 요소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연 과정에서 나름대로 고쳐지고 청중에 의해 완성된다. 관객석에서 지켜보는 서양 공연 예술과 달리 판소리에서 청중은 추임새를 통해 공연에 참여하며, 청중들의 추임새라는 적극적인 개입으로 완전한 공연이 된다.
‘길거리 예술’에서 ‘명창’의 시대로
대중의 희로애락을 담은 판소리
대중의 삶의 희로애락을 음악과 어울려 표현하며 청중도 참여하는 민중예술인 판소리는 오늘날 전문적인 예술로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공연 예술로 자리잡았다.
별도의 악보 없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서편제, 동편제, 중고제 등 창법에 차이가 생기기는 했지만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민중예술로서 서민 의식을 반영해 작품 안에 평민들의 인상어, 욕설 등이 혼재되어 있다. 서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과정에서 그들의 현실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새로운 사회와 시대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판소리는 민중예술을 대표한다.
조선 중기 이후 남도 지방에서 발달한 판소리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시작되어 19세기 말에는 ‘판소리의 황금시대’라 불릴 정도로 대중에게 인기가 높았다. 18세기 중엽에 고정된 레퍼토리가 형성되었는데, 당시에는 한 마당의 길이가 길지 않았고,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토별가), 〈흥보가〉(박타령), 〈적벽가〉, 〈배비장타령〉, 〈변강쇠타령〉, 〈장끼타령〉, 〈옹고집타령〉, 〈무숙이타령〉, 〈강릉매화타령〉, 〈가짜신선타령〉 등 그 수가 많았다.
평민들 사이에 인기가 있던 판소리를 양반들도 함께 누리게 되면서,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서민적인 내용과 음악이 양반들의 취향에 맞게 바뀌고 무게감이 실리게 되었다. 서민적인 재담이 많은 것은 도태되고 사대부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정리되면서 이 결과 충, 효, 의리, 정절 등 조선시대의 가치관을 담은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와 〈변강쇠가〉 등으로 정착되어 보다 예술적이고 전문적인 장르로 자리잡았다.
판소리를 정립하고 격을 높인 신재효
그가 새롭게 정리한 〈심청가〉
생활 속의 공연이던 판소리를 예술로 승화되는 과정에서 절대 빠뜨리지 말아야 할 인물이 신재효다. 그는 판소리 열두 마당을 여섯 마당으로 정리하며 예술적인 음악으로 가다듬었고, 판소리를 전문적인 예술로 승화시켰으며, 판소리 이론을 정립했다. 고도의 수련을 거친 명창들을 길러내기도 했는데, 이 중 한 명이 조선 최초의 여성 명창인 진채선이다.
신재효가 판소리에 몰두한 데는 그의 아버지가 모은 재산과 남다른 재능이 큰 몫을 했다. 고창 관아의 관약방을 맡으며 상당한 재산을 모은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그는 중인 계급의 한계로 과거를 볼 수 없고 벼슬길이 막혔다. 이 경우 저항의 길을 걷는 경우가 적지 않은 데 반해 그는 이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했지만 중인 계급 때문에 벼슬길에 나아갈 도리가 없었던 그는 음악에 관심을 두기 시작해 가무 음률에 정통했고 가곡, 창악, 속요까지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자기 집을 자신의 아호인 ‘동리’를 따서 동리정사라 이름 붙이고 소리청을 만들어 소리꾼들을 불러들였다. 당시 소리꾼들은 판소리의 가사 내용을 이해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음을 제멋대로 부르기 일쑤였는데, 그는 이들을 모아 문자를 가르치고 판소리의 정확한 발음과 뜻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고전 소설을 토대로 한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가〉 여섯 편의 가사를 고쳐, 난잡하거나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을 합리적이고 품위 있게 정리하고 체계를 세웠다. 이를 통해 민중예술이던 판소리를 전문적인 예술 장르로 격을 높였다.
《인당수 험한 물결 속에》
〈심청가〉를 쉽게 풀어 쓰다
〈심청가〉는 현존하는 판소리 다섯 마당 중의 하나로 구전되어 오던 〈심청전〉의 내용을 판소리로 만든 것이다. 심청이의 효성을 통해 아버지가 눈을 뜬다는 이야기를 노래한 판소리로, 비극성이 가장 강조된 작품이다. 과거에는 너무 슬픈 소리라 하여 높게 치지 않았으나 근래에는 〈춘향가〉와 함께 작품의 짜임새와 극적 구성 등에서 예술성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유명한 대목이 많아 ‘작은 춘향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효녀 심청이 눈먼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신을 공양미 삼백 석에 팔고 인당수의 제물이 되지만 다시 환생하여 황후가 되고 이후 아버지의 눈도 뜨게 한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는데, 전반부가 심청이 죽음을 향해 가는 비극적 구조로 되어 있다면, 후반부는 뺑덕어미라는 희극적인 등장인물과 해피앤딩의 극적 구성으로 골계적이고 축제적인 구조로 전반부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심청의 ‘효행’이 있다.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몸을 팔아야 했던 심청의 상황과 죽음, 그리고 심청의 ‘희생효’로써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이야기는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효라는 보편적인 가치관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희생을 통한 인간 구원’으로 이어진다.
《인당수 험한 물결 속에》는 신재효의 〈심청가〉를 작품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쉽게 풀고 다듬었으며, 필요한 경우 본문에 뜻풀이를 달았다. 이를 통해 〈심청가〉를 쉽게 즐기며, 우리 민족의 전통 공연 예술인 판소리를 좀 더 가까이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