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여행, 친구, 삶의 교집합
저자는 이 책을 시작하면서 “코로나19가 시작된 2020년 이후에는 내 안에서 ‘일본’이라는 틀이 희미해져, 세계 각지에 있는 다양한 시대의 음악을 주로 내 흥미대로 틀고 있다”(2쪽)고 말한다. 여러 나라를 쉽게 오가기 어려웠던 시기가 오히려 음악의 경계를 여러 시공간으로 확장시킨 계기가 된 셈이다.
글을 쓰는 것보다 음악을 고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는 저자는 책 속 음악의 흐름을 일종의 여행처럼 구성했다. 먼저 몽골, 버마/미얀마, 캄보디아, 카자흐스탄 등 아시아의 음악들이 흐르고, 이집트, 에티오피아, 소말릴란드, 짐바브웨, 니제르, 알제리 등 아프리카의 음악이 이어진다. 뒤이어 영국과 스웨덴 등 유럽을 향하던 귀가 아메리카 대륙의 미국과 쿠바와 베네수엘라와 브라질을 지나고, 일본과 한국을 오간다. 그리고 특별한 상황에 놓였거나 놓여 있는 이란, 독일, 중국을 거쳐 다시 한국에 다다른다. 지금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세계를 한 바퀴 크게 돌고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오는 음악 여정은 여행을 즐겨 다니다가 고립된 상황에 처하면서 발견하게 된 새로운 길이었다. 여러 나라의 음악을 여러 경로를 거쳐 들으면서 그는 자연히 “음악을 통해 세계 곳곳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될 필요”(3쪽)를 느낀다. 군사 쿠데타 이후 군부의 탄압이 여전한 미얀마, 일본 정부의 일방적인 동화정책 이후 계속되는 편견과 차별 속에 놓여 있는 아이누 문화, 결국 오키나와 앞바다에 건설되기 시작한 미군 기지, 여전히 요원해 보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 각 나라의 악기들도 조금은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서양의 12평균율과 달리 조율되어 있고 전혀 다른 주법으로 연주되는 미얀마식 피아노 산다야, 서양음악의 반음보다 더 세밀한 소리인 미분음이 존재하는 아랍 음악, 짐바브웨 쇼나인의 신앙 그리고 국가의 독립과 깊게 연결된 악기 음비라…. 음악마다 깃들어 있는 세계의 복잡한 정세와 주어진 상황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재가 음악과 삶을 함께 바라보도록 이끈다.
또한 저자는 음악의 안팎에서 만난 친구들의 이야기를 곳곳에서 들려준다. 커피점과 여러 방식으로 교류하며 수년간 음악적 우정을 쌓은 한국과 일본의 친구들과 공간들에 관한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그가 주변의 친구들에게 시시때때로 건넬 법한 위트 있는 문장들과 함께) 읽다 보면 오늘날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연결되고 이어지는 삶에 대해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게 된다. (예술가들의) ‘표현’에 대해 그가 생각하는 바가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타자와 세계에 대한 공감을 품게 하는 것이 표현의 본질이라고, 안도 우메코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79쪽) 이렇게 『커피 내리며 듣는 음악』은 저자에게 “다양한 음악적 만남을 제공해 준 친구들”이, 저자와 “시대를 함께해 준 음악과 음악가들”(128쪽)이 함께 만든 책이 된다.
공연을 감상하고 앨범을 소장한다는 것
“나는 음악을 즐기는 최상의 방법은 ‘라이브’라고 믿는다.”(9쪽) 첫 번째 음반을 소개하는 글에서, 저자는 이렇게 단언한다. 가능한 한 아무 정보 없이 공연장에 가서 음악을 처음 온몸으로 체험하는 묘미를 피력하던 그는 다시 이렇게 쓴다. “하지만 공연이 사라진 코로나 시대에, 나의 듣는 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음반에는 음반의 장점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공연을 라이브로 감상하고 앨범을 소장해 온 삶의 방식은 이를테면 드립 방식으로 커피를 내리고 종이 책을 구입해 읽는 행동과도 통하는 지점이 있어 보인다. 필요한 경우 음원 스트리밍을 이용하고 유튜브로 동영상을 찾아보지만 그렇다고 아날로그적인 방식을 버리지는 않는다. 어느 한쪽을 배제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선택해 나간다. 우리가 평소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균형 있는 매일을 보내며 살아가는 것이 어떠한 형태와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 이 책은 몸소 증명해 보인다.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내다가 언제든 문득 ‘처음’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그 또한 저자가 잊지 않고자 하는 ‘록의 정신’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긴 음악 여정의 마지막은 약 20년 전 그가 아시아 여행 중 우연히 만났던 자우림의 앨범이다.
“이윽고 몇 가지 우연을 거쳐 나는 한국에 거주하게 되었고 (…) 다소 내성적인 기분이 드는 밤, 오랜만에 「거지」를 들으면 아시아 곳곳을 떠돌던 그때의 자유로운 기분이 떠오르며 오늘의 잠자리가 없더라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듯한 터무니없는 힘이 생긴다.”(1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