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적 합리성은 어떻게
정착되어 가는가?”
의학적 치료의 근거를 합리적 이론에서 찾는
조르주 캉길렘의 빛나는 통찰
조르주 캉길렘의 『이데올로기와 합리성』은 의학과 철학의 밀접한 관계를 탐구하며, 생명과학과 의학의 본질을 재조명한다. 현대 의학이 직면한 철학적 딜레마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역사적 성찰을 제시하는 이 책은, 생기론적 전통과 실증주의적 전통의 대립을 넘어서 새로운 의학적 합리성을 모색한 캉길렘의 이론을 보여 준다. 의학이 철학적 사유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이유, 의학적 치료의 근거를 합리적 이론에서 찾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깊이 있게 다룬 캉길렘의 통찰은 현재의 의학을 사유하게 한다.
의학과 철학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의학과 철학은 서양 의학의 역사 내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의학이 질병에 대한 경험적 치료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할 근거를 찾고자 할 때 철학적 사유가 도움을 주었다. 즉 의학을 어떤 것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 규정에 대한 모종의 철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서 의학은 철학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오늘날의 현대의학은, 그것의 자기규정이나 미래에 대한 전망이 특정한 철학적 입장 위에 서 있음에도 마치 철학과는 무관한 학문처럼 생각되며, 그 진리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불변의 것으로 절대화되는 오류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의학에 대한 깊이 있는 반성은 의학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의학의 생성과 변천 과정에 대한 역사적 성찰을 통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데올로기와 합리성』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된다.
“의사는 화가가 아니라 역사가다”
조르주 캉길렘과 의학의 역사성 회복
생명이 생물이 가지고 있는 ‘생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기론은 전통의학의 근간이 되는 철학으로서, 결국 어떤 방식의 의학철학을 전개하는가 하는 문제는 생기론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의학철학의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져 왔다. 20세기 프랑스에서 생기론의 문제를 가장 깊이 있게 다룬 캉길렘은, 생기론은 방법이기보다는 당위적인 요청이고, 이론이기보다는 정신적인 가치이며, 의학이 인간이라는 지극히 가치지향적인 존재의 문제를 다루는 한 생기론의 문제는 의학철학의 중심적인 문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프랑스 의학철학의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실증주의적 전통이다. 생기론적 전통과 반대로 실증주의는 당위적 요청이기보다는 방법이고, 정신적인 가치라기보다는 이론이다. 의학적 사실은 관찰과 실험, 그리고 추론을 통해 증명될 수밖에 없다는 실증적 정신, 자연과학의 방법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프랑스 의학에서 생기론적 전통과 실증주의적 전통은 몽펠리에 학파와 파리 임상의학파의 대립으로 나타났고 그것은 의학의 내용과 철학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렇다면 당위와 요청으로서의 생기론적 전통과 이론과 방법으로서의 실증주의적 전통은 화해할 수 없는 것일까? 양대 전통의 대립은 20세기에 들어와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그것은 역사라는 매개를 통한 길이었다. 의학의 역사성을 회복하는 것은 19세기 의학철학이 처한 딜레마를 완전히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문제 상황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해 주었다. 이를 우리는 역사적 인식론의 전통이라 명명하며, 이 작업은 대표적으로 조르주 캉길렘에 의해 이루어졌다.
의학의 ‘개별성’은 보편적인 질병 경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서 온다. 여타 자연과학의 대상과는 달리 의학의 대상은 그 자체로 역사를 가지는 개별자로서의 인간이다. 따라서 의사는 일종의 역사가라 할 수 있으며, 캉길렘은 생기론과 실증주의 대립을 질병 경험의 역사성에 근거해 새롭게 해석하고, 객관적 병리학이 개별자의 질병 체험에서 무력해질 수 있음을 ‘유기체의 내적 규범’(합리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논증함으로써 의학철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지금 여기, 우리의 의료 현실에 꼭 필요한 논의,
이데올로기와 합리성
캉길렘은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과학을 순수하게 분리하거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입장 모두에 반대하며, 과학사가는 두 차원에서 동시에 작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합리성’이란 캉길렘이 ‘이데올로기’의 상대개념으로 제시하는 것으로서, 생명과학에서의 합리성은 생명체의 내적 규점, 의학적 합리성은 치료의 근거를 합리적 이론에서 찾는 것을 가리킨다. 앞서 말했듯 의학이 개별자의 질병 경험 치료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생명과학의 다른 분야들과 구분된다고 할 때, 의학적 합리성이란 이 치료의 근거가 유기체에 대한 보편적 지식, 합리적 이론에 근거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학적 합리성은 근대 서양 의학의 가장 큰 특징을 이룬다. 생명과학과 의학을 철학적 사유의 중심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 객관적인 방식으로 확립시킨 병리학이 개별자의 질병 체험에서는 무력해질 수 있음을 유기체의 내적 규범이라는 개념을 통해 논증함으로써 의학철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생물학적 개체성을 새로운 의학적 합리성에 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캉길렘은 의학철학의 역사에서 가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인물이다. 프랑스 의학철학의 전통이 당대의 의학 전통에 대한 성찰에 뿌리를 두고 발전해 왔듯, 이 책 또한 의학에 대한 우리의 철학적 논의를 풍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