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년 만에 독립운동가들이 필사해 펴낸 노래집을 녹음하여 복원하다!
북간도 국자가 소영자라는 마을에는 두만강을 넘어온 조선인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마을이 생기고 시장이 생기고 학교도 생겼다. 1912년 그곳에서 이동휘(李東輝), 계봉우(桂奉瑀) 등 독립운동가가 광성학교라는 민족학교를 만들었다. 그 학교에서 교사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언어, 문화를 노래로 가르치려고 창가집 하나를 만들고자 했다.
먼저 일제의 강제 병합 이전부터 불러왔던 애국가, 독립가, 항일가, 자유가, 학도가, 운동가 등을 수집했다. 그중 152곡을 선별하여 한 곡마다 여러 절의 가사를 달아 일일이 악보를 손으로 그리고, 부록으로 서양음악 이론도 넣어 246쪽 분량의 필사 원고를 등사해서 발행했다. 이름은 평범하게 『최신창가집』으로 지었지만, 발행일도 정확히 ‘四二四七年(1914) 7월 25일로 쓰고 소영자 광성중학교(小榮子 光成中學校)라는 발행처를 적어 판권을 쓰고 야심차게 책을 펴내었다.
창가는 당시 유행했던 서양식 곡조에 계몽적, 애국적 내용을 담은 노래다.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르기 위해 지었고 주로 학교에서 불렀다. 이 노래들을 모아 놓은 가사집이나 악보집이 창가집이다. 또 당시 새로운 문물, 풍조, 제조, 행위 등에 붙이는 ‘최신’이라는 말도 유행했다. 그런 유행 속에서 생겨난 노래책이었기에 광성학교 『최신창가집』은 이상준이 펴낸 『최신창가집(전)』(1918)과 동일한 이름을 갖고 있다.
광성중학교 『최신창가집』 발행자들은 이 창가집을 광성학교 학생만이 아니라 다른 학교에서도, 또 학생의 부모와 형제들, 조선인이라면 누구라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조선인 서점에서 판매하도록 했다. 책이 서점에서 팔리기 시작하자 일본 총영사관에서는 불온서적으로 간주해 압수하고 발간과 판매를 금지하였다. 학교도 폐교되었다. 일제는 이 창가집이 단순한 노래책이 아니라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 시키는 큰 불씨가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후 이 창가집을 소지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책을 스스로 불태우고 버렸다. 창가집을 만들기보다 차라리 외우고 입으로 전하는 방법을 택했다. 노래를 읊조리면서 나라 잃은 분노를 삼키고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시대가 점점 더 험악해지고 일제에 의해 희생되는 가족과 동지가 늘어갈수록 노래는 더욱더 절절하게 그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렇게 고난에 찬 시대가 가고 30년이 지나서야 광복을 이루었다. 광복은 되었지만, 이 창가집을 찾으려는 노력은 없었고, 당시 불렸던 노래들은 오랫동안 잊혔다. 그러다가 일본 외무성 압수문서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광복 50년 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햇빛 한 점 없는 압수문서 창고에 수감 되었던 덕분으로 압수된 지 80년 만에 오롯이 다시 우리에게 올 수 있었다. 국가보훈처는 이 창가집을 영인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창가집에 담긴 소리를 여전히 들어볼 수 없었다. 그렇게 또 30년이 흘러갔다.
이제 드디어 오랜 우여곡절 속에 광성학교 『최신창가집』은 110년 만에 『1914 북간도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상에 그 소리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암울한 시절에도 우리민족의 기상과 긍지를 끝끝내 지키고자 했던 선조들의 정신이 생생한 가사와 선율로 오늘 우리의 귀와 마음을 적시게 된 것이다.
나의 스승 노동은 선생님은 2016년 12월 2일에 운명하셨다. 돌아가시기 불과 며칠 전 병상에 누워 계신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였다. 병원 침대 머리맡에 놓고 교정을 보던 『항일음악 330곡집』을 보여주시며 기쁨에 찬 목소리로 “이 책이 이제 곧 나올거야” 라고 하셨다.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젊은 시절 한국의 근대음악사 연구를 하고 싶어 노동은 선생님의 제자가 되길 자처하였고 그 후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정작 선생님이 궁극적으로 연구하려던 분야가 무엇이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이 『항일음악 330곡집』에 실은 수십 곡의 광성학교 『최신창가집』 노래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도 그때는 몰랐다.
지난 몇 년간, 한국의 근대음악사 연구에 평생을 바쳐 온 노동은 선생님의 유물과 유산들이 가치 있게 소용되도록 이관 처를 물색하고 이관을 추진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여 왔다. 그 사이 『항일음악 330곡집』이 유작으로 출판되었다. 그런 계기와 인연으로 항일음악연구 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분야의 연구를 시작하면서 광성학교 『최신창가집』을 만나게 되었다. 뒤늦게서야 이 창가집의 가치를 깨달으며 전율이 일었다. 감동에 젖어 악보도 그려보고 가사도 반복해 읽고 써보면서 연구도 하고 논문도 발표하게 되었다.
하지만 글과 논문만으로는 일반 사람들이 이 유물의 가치를 온전히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 연구의 한계를 느꼈다. 이 노래의 의미를 제대로 되새기고 우리 선조의 뜨거운 정서를 느끼려면 실제 소리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악보집을 내고 논문을 발표한들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책에 담긴 152곡의 소리를 대중에게 직접 들려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다행히 2023년 경기문화재단에서 모집한 ‘일제잔재청산 및 항일 추진 공모사업’에 지원, 선정되어 이 책에 담긴 노래들을 실제 소리로 되살리고자 한 바람을 마침내 이룰 수 있었다.
이 작업을 기꺼이 함께해 준 든든한 후배 권용만, 신성은과 김연수 님에게 감사드린다. 연주에 참여해 주신 장호영, 여정윤, 권휘수, 윤세영, 권세인 님, 깨끗한 음원을 만들어 준 이한용 님에게도 감사드린다. 보기 불편한 원문 악보를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152곡을 여러 차례 사보하고 일일이 QR코드를 만들어 준 정수민 님, 꼼꼼히 교정을 봐 준 김현수, 황봉덕 님, 어려운 진행을 기꺼이 맡아 준 문정아 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불여귀〉의 1절부터 3절까지 고대의 전설이 4절의 안중근에게 연결되어 있음을 일깨워주시며 어려운 한문 투와 고어들을 읽어주면서 교정을 함께 해 주신 이충구, 김재열 선생님 두 어른의 애정 어린 관심에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이 창가집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이제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철사주사로 결박한 줄을 우리의 손으로 끊어버리고” “절박 정황 급하지만”, “긴 날이 맞도록 생각해도” “내가 내 나라를 사랑하지 누가 내 나라를 사랑해” “내가 가면 영 갈소냐” “잊었나 잊었나 합병한 수치를” 같은 가사를 들어보라. 그러면, 우리의 선조들이 그 큰 압박과 번뇌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서로를 독려하고, 두려움을 떨치고, 깊은 어둠을 꿋꿋이 헤쳐나간 그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울컥해질 것이다.
2024년 05월 15일
고기동에서 김수현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