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를 전쟁 국면으로 몰아넣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평화와 평등으로 나아가는 길에 관한 끈질긴 모색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갈등은 한반도의 위기와도 연결된다. 그러나 남북한은 물론 세계의 분쟁과 반목이 날이 갈수록 심화하며 출로를 찾기 난감한 형국이다. 기후 재난 등의 위기에 맞서 전 세계가 머리를 맞대고 인류의 생존과 평화를 모색해야 할 시점에, 오히려 지배세력의 탐욕과 야만이 모두를 파멸의 길로 몰아가는 엄혹한 시대다. 이러한 상황에서 머리를 맞댄 한국, 중국, 일본, 대만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각 국가와 민족, 사회의 입지에서 엄습한 위기에 대한 문제 인식을 소통하고, 전후 세계적 냉전의 체제화 속에 평화 경로를 찾아나갔던 아시아와 유럽의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다. 아울러 21세기 미국 중심의 글로벌 패권 질서의 전환 국면에서 전쟁이라는 공멸 대신 국가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 함께 평화로 가는 경로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 책은 ‘포스트 지구화 시대, 전쟁이라는 파국과 출로’, ‘정전체제에서 평화체제로, 한반도 평화는 가능한가’, ‘평화의 세기를 위한 단절과 전환의 기획’의 3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주제의 글들과 이에 대한 논평을 함께 실었다.
먼저 ‘여는 글’의 왕샤오밍은 세계적 전쟁 발발의 원인을 ‘통제력’ 상실에서 찾는다. 중국의 근현대사 전개에 비춰 이를 설명하면서, 사회의 불안정한 추세가 어둡고 부정적인 집단의식을 낳지만, 이러한 사회적 적대감의 확장이 긴장을 상기해 평화로 가는 조건을 형성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왕샤오밍은 정글 같은 사회의 ‘통제 불능’이 인류에게 큰 재앙을 초래한다고 경고하며, “더 많은 사회가 자기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정글의 법칙을 뛰어넘고, 형형색색의 ‘적대감’을 타파하며, 평화에 필요한 문화와 기타 사회 조건들을 발전시킨다면, 인류 또한 지구의 평화에 한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서술한다. 한편으로 “인간이 비관과 증오를 극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보를 추구하는 가장 큰 동력은 낙관과 이상주의가 아닌 비관주의와 암울함, 파괴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 대립 극복하기
새로운 저항 주체들의 부상과 연대를 통한 전환의 가능성
1부에서 이은정은 냉전 종식 이후 유럽에서 평화를 구축한 과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독일 통일 등 역사적 경험을 이유로 한반도 문제 해결의 동반자가 될 수 있던 유럽연합이 현재 동아시아 평화체제를 위한 적극적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이동기는 수없이 많은 평화정치 논의들, 평화프로세스의 유지와 확장의 의미에 주목하며 이상주의가 아닌 현실주의에 근거한 ‘평화들’을 제기했다. 노경덕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서방의 시각에 편중된 현실을 문제 삼으며 객관적 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최근 남북한의 군사안보적 긴장 상태를 고려할 때 2부의 논의는 더욱 중요성을 가진다. 이남주는 한반도 전쟁 위기 가능성을 경고하며 상호 위협 감축을 통한 신뢰 구축으로 평화적 해결 방식을 만들어 나갈 필요성을 역설한다. 북한 비핵화만을 요구하는 접근법, 특히 ‘힘에 의한 평화’ 논리가 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강호제는 새로운 남북관계를 위해 과학기술 분야와 교육에서의 협력을 제안한다.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염두에 둔 ‘대등한 수준’에서의 교류를 위해 ‘소프트 사이언스’ 등 구체적인 방안을 다뤘다. 김성경은 신자유주의적 한국 사회에서 징후적으로 포착되는 평화 무감각과 ‘멸망의 정동’의 관계성에 천착한다. 경제적 가치만이 유일한 척도가 된 사회에서 파편화, 탈역사화한 개인들일지라도 평화는 생존과 깊은 관련이 있다며, 사회 리셋 의지의 표명으로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을 읽어낸다.
3부에서는 전쟁의 세기를 평화의 세기로 전환하기 위해 절연할 것과 구체적으로 기획할 것을 논의한다. 천신싱은 미군기지 반대 운동의 현재와 의미를 살핀 후, 미중 대립을 신냉전으로 보는 담론을 비판한다. 오늘날의 대립은 민족주의 대 보편가치로, 자본주의 경제에서 누가 효율적인지의 경쟁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양안(중국-대만)과 남북한의 ‘긴장 속 평화’에 대해 성찰을 촉구하며, 상호 충돌과 이해 속에서 나누는 선의가 미래 평화를 위한 길이 될 것이라 전망한다. 이케가미 요시히코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맥락에서 일본 근대사를 총괄하며 정치적 해결의 경로를 제기한다. 눈앞의 전쟁을 멈추기 위해 정치의 회복과 타협을 거듭해야 한다는 것이다. 백원담은 다양한 국가, 지역, 사회 동력의 적극적 대응을 복수성 정치의 개진 관점에서 포착해 미국 중심의 패권적 지배질서를 전환할 가능성에 관해 논의한다. 글로벌 사우스들, 즉 비동맹/제3세계운동은 물론 세계 곳곳의 노동운동, 기후정의운동, 확장된 민중운동들과 함께하는 것이 진정한 평화를 만드는 첩경이라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