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의 소통지대 넓히기와 내부비판의 슬픈 운명
충돌하는 두 진영 간에 화해와 소통이 가능하려면 중간파ㆍ중도파의 존재는 필수다. 그런데 그 중간파의 약점과 앞날을 강준만은 잘 알고 있다. “제공할 이익이 없고, 피를 끓게 하는 담론을 생산해낼 수 없”기 때문에 “한국처럼 ‘급변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사회에서 이익과 공정 분배를 선호하고 피와 열정을 멀리하는 중간파의 운명은 고독과 고립”(124쪽)뿐임을 너무도 잘 안다. 그런데도 강준만은 “나 또한 과거에 뜨거운 당파성을 갖고 글쓰기를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가 과도한 격정과 그에 따른 극단적 당파성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절감한 이후엔 ‘소통’을 역설”(123쪽)할 수밖에 없다며 그 운명을 자진해서 받아들였다.
강준만은 ‘소통 전도사’다. 대략 2005년을 기점으로 ‘독설의 전사’에서 ‘소통 전도사’로 변신했다. 10:0의 승자독식이 아닌,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51:49의 지혜를 나누자고 말해왔다. 누구보다 독한 언어로 남을 공격하고 공격을 받기도 했던 사람인데 진영 간 소통을 위해 자신의 당파성까지 포기한다고 선언했으니 강준만의 호소를 귀 기울여 들을 만도 하건만 ‘소통 전도사’ 모습은 대중들에게 스며들지 못했다. 오히려 소통을 말할수록 그의 존재감은 줄어들었다. ‘소통’을 말하기 위해 ‘진보 싸가지론’을 들고 나오기도 했는데 소통은 온 데 간 데 없고 ‘싸가지’라는 말만 남았다. (9쪽)
이른바 87년 민주화 체제 이후, 화해와 소통 문제에서는 그래도 진보가 보수보다는 나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보수는 역사 발전에 거꾸로 걸음하는 경우가 많아 ‘반동’이란 단어에 쉽게 붙들렸다. 그런데 진보마저 변화ㆍ발전이란 자기 정체성에 반하는 수구적ㆍ퇴행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게 강준만의 진단이다.
민주화 투쟁가들은 민주화의 은인이다. 하지만 그들의 습속과 자질은 민주화 이후의 정치엔 맞지 않는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게 세상이다. (…) 이들은 보수를 거대한 적으로 내세워 시효가 끝난 민주화 투쟁 모델을 연장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하고 있다. 보수의 한심한 수준과 행태에도 책임이 있지만 그게 진보의 면책 사유가 될 수 없다. (37쪽)
바로 그와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참여정부 이후 오늘에까지 20여 년을 ‘진보반동의 시대’라 명명한다. “무엇보다 진보는 ‘우리들이 아무리 못해도 저들보다는 낫다’는 도덕적 우월감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성찰의 끈을 놓아버려 ‘내로남불’을 당연한 듯 저지르는 데까지 이르렀단 것이다.
권력 만능주의와 정서적 급진주의에 빠져 갈등과 대결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권력을 잡으려 했던 진보 퇴행의 시대, 집권기 동안 진보다운 의제 설정이나 문제 해법을 보여주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든 진보 무능의 시대, 조국 사태와 박원순 사건에서 단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자신들에게 적용하는 잣대와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잣대가 다른 진보 위선의 시대. 이 모든 것을 묶어 ‘진보 반동’이라고 부른다고 강준만이 달리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7쪽)
저자가 진보반동의 시대라 부르는 시기는, ‘전기’ 강준만(‘실명비판’을 무기삼아 왕성한 비평 활동을 벌이던 1995년~2004년) 이후의 ‘이행기’ 강준만(『인물과 사상』의 막을 내리고 ‘소통’을 화두 삼기 시작하던 2005년~2011년)과 ‘후기’ 강준만(가열찬 ‘진보 비판’에 진력해온 2011년~현재) 시기에 정확히 겹친다. 강준만이 진보에서 스스로를 퇴출시킨 후, 그의 글이 불편하고 그의 존재가 거북해진 ‘옛 지지자들’로부터 배신과 변절의 딱지를 받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런 “홀대와 푸대접은 강준만이 ‘내부고발자’라는 증거”에 다름 아니라며, 진보의 위선과 퇴행에 대한 강준만의 비판 사례들도 촘촘히 거론한다.
팬덤정치라는 反정치의 위험
내부비판을 일종의 계파 싸움으로 치부한 채 자기교정의 메커니즘을 뭉개온 우리 정치, 그렇게 소통의 출구 자체가 봉쇄됨으로써 우리가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은 엄청나다는 강준만의 문제의식은 자연스레 ‘팬덤정치’를 타깃 삼게 된다. 책임 없는 대중에게 중요한 의사결정을 맡기는 팬덤정치는 대의정치와 정당정치를 멍들게 할 뿐이란 점에서다. 심각한 ‘참여 격차’의 문제는 짐짓 모른 체하며 참여의 미덕만 강조하는 건 위선이거나 기만 아니겠냔 것이다.
강준만은 ‘정치화된’ 소수가 소극적인 다수를 제압하는 위험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그 위험성은 더 커졌다. 참여정부가 그런 위험성을 실제로 보여준 첫번째 사례였고 문재인의 문빠, 이재명의 개딸이 지배하는 민주당의 모습은 그런 위험성이 더 극적으로 드러난 모습일 것이다. 민주당 안에서 이어지고 있는 팬덤 정치의 득세는 왜곡된 형태의 대중 참여이고, 그 근저에는 반지성주의가 흐르고 있다고 본다. (183쪽)
따라서 팬덤정치는 곧 반정치에 다름 아니라며 이에 극히 부정적인 강준만이 ‘팬덤정치의 CEO’ 이재명에게 보다 냉혹한 비판을 가하게 된 건 당연하다. 이런 비평행위는 또 진영에 따라 서로 반대로 해석되는 아이러니를 낳기도 한다. 그러는 가운데 새삼, 강준만은 도대체 왜 저러는지, 세상은 또 강준만을 왜 그리 대하는지를 하나씩 둘씩 깨닫게 된다.
보수 진영에서 강준만을 후하게 평가할 때 쓰는 표현이 ‘스스로를 성찰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진보 지식인’이다. 그러나 ‘난 보수 같은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래서 보수를 비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을 보수라고 할 수는 없다. 당파성을 버렸다고 하지만 여전히 진보의 영지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몸은 때때로 오른편으로 기울기도 하지만 뿌리는 단단히 왼쪽에 두고 있는 사람이다. (39쪽)
영원한 현역의 삶
강준만은 현재도 〈한겨레〉 〈경향신문〉 〈시사저널〉 〈신동아〉 〈무등일보〉 〈영남일보〉 등에 칼럼과 기고를 왕성히 이어가고 있다. 더불어 두 달이 멀다 하고 신간을 쏟아내는 다작은 읽는 속도보다 쓰는 속도가 빠르다고 할 정도로 유명하다. 이미 300권에 가까운 저서가 바로 그 증거다. 이 지칠 줄 모르는 생산력의 원천을 강준만 자신은 읽고 쓰기 중독자라서 그렇다고 말하는데, 이에 저자는 오로지 읽고 쓰는 데 바쳐지는 봉쇄수도원의 삶 같은 일상, 인정욕구의 실현으로서 세상과의 소통이자 자기 존재증명이 되고 있는 책, 다독 과정에서 생성되는 나름의 자료 분류법 등에서 찾는다. 그 밑바닥에는 ‘진보 전문가’로서 여전히 남아 있는 과제에 대한 ‘무한대의 책임’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강준만의 끊이지 않는 작업으로 인해 그의 저서들을 제때 따라 읽어올 수 없었던 독자들에게는 이 책 『강준만의 투쟁』이 그간의 결과물들을 압축적으로 소화하는 기회도 될 것이다. 이밖에도, 인간 강준만의 다양한 면모와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도 소개하여 지식인 강준만의 비평 역정과 그 전모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해보는 계기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