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불교는 논리(論理)’라고 규정한다. 하여 선(禪) 불교도 당연히 ‘선의 논리’를 적용해야 ‘선적 깨달음’의 지취(旨趣)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즉 제법의 오묘한 교리를 배제하고, 선정(禪定)의 신비적인 현묘한 경지를 배척한다.
그에게 불교가 주는 대명제는 목전 경계(境界)에서 ‘무아(無我)’ 또는 ‘공(空)함’을 깨쳐 자증(自證)하라는 것이며, 그 자증은 곧 붓다의 초전법륜(初轉法輪)에서 제시하는, 인생의 전반에 걸쳐 수시로 나드는 삶의 괴로운 사실을 사실대로 바로 보아[正見] 현장에서 해탈을 성취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삶의 괴로운 사실을 사실대로 바로 본다[正見]’는 것은 ‘심리적ㆍ물리적 생멸 변화[無常]를 지각하고 인식함에 그 「연기(緣起)」하여 변화하는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지견(知見)을 확립하고 자증하는 것이다.
이 자증처를 다시 말한다면, 변화하는 심리적ㆍ물리적 사상(事相)은 ‘무아(無我)요 무자성(無自性)이요 무자체(無自體)인, 즉 공성(空性)인 존재요, 통찰(洞察)하는 인식의 「논리적 귀결처」임을 명징하게 증득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수행자가 이 법계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을 정견한다면, 마음은 밝고 맑아 치우쳐 변견(邊見)에 매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종래의 번뇌[苦]에서 해탈하고 새로운 괴로움을 만들지 않아서, 삶의 터전에서는 하는 일마다 자유롭고 자기 자신에게도 좋고 남에게도 좋은 행이 될 것이다.
교가(敎家)든 선가(禪家)든 결국에는 ‘깨쳐야 할 불교의 본질’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저자의 게송 선시-대체로 오언절구와 칠언절구의 근체시이며, 몇 수의 고체시도 보인다-에는 그의 수행 가풍이 온전히 드러나 있다. 〈능허 거사에게〉라는 시를 보자.
반야월을/ 제대로 보려는가
비 갠 뒤 맑은 바람에/ 창공의 달을 보라
마음을 텅 비우면/ 부처인들 조사인들 있겠는가
이러한 경계라야/ 백우(白牛)가 깃들으리
能見般若月하려면 光風濟月兮하라
虛心無佛祖러니 此境白牛栖리라
또한 스님은 “연기하는 세계에서는 뗏목과 같은 가명(假名)의 현상이 실상(實相)의 묘용(妙用)을 보이는 조건이다. 가명의 허상을 통하지 않고서는 무상(無常)의 진실을 볼 수 없다. 무자성(無自性)의 사실을 볼 수 없다. 하여 가명의 허상을 버리면 공성(空性)의 도리를, 법성(法性)의 도리를 다 버리는 것이다. 길을 버리고 나서는 어디로 가서 따로 무슨 길을 찾을 것인가? 물속의 달로써 창공의 명월을 본다.”고 말하면서, “세간 살림 살면서 속는 것도 ‘나’이고 속지 않는 것도 ‘나’이다”고 한다. 자유시 중에서 〈따비밭 일구려〉에 이런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산길은 돌길/ 경사 급하고
낙엽 속에 미끄럽기도
행각길 투덕투덕/ 비탈길도 만만찮고
산기슭 일구는데/ 돌도 하도할샤
거르고 걸러내도/ 자꾸만 나온다
그렇다고 아니 할까/ 미끄러진다고 아니 갈까
부딪치는 데/ 외려 거기 길 있고
돌무지 들어내는 맛도 있으려니
맘 걸고 가지 않으면
따비밭 언제 일구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