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게잡이 선원에서 돼지농장 똥꾼까지
1부 ‘이틀발이’는 진도 꽃게잡이 배에서 일한 극한의 시간을 그렸다. 동료들의 얼굴은 모두 짙은 캐러멜빛이었다. 화물선에서 원양어선까지 안 타본 배가 없는 갑판장, 강북 나이트클럽 출신 한주 형, 트럭 행상으로 빚지고 노가다 판을 전전하다가 온 큰형님, 돈 벌어 PC방 차리는 게 꿈인 윤철이 형, 말수가 적은 게 유일한 미덕인 선주. 직업소개소에 갔다가 얼떨결에 통발 배를 선택한 작가는 이들과 파도에 흔들리는 작업장에서 우여곡절의 서사시를 완성한다. 배설의 순간마저 배 난간에서 위태롭게 해결해야 하는 환경에서 작가는 매 순간 흔들리고 절망한다.
2부 ‘빈민의 호텔’에서 작가는 서울의 월 12만 원짜리 고시원에 거주하며 편의점과 주유소에서 일한다. 편의점과 주유소 역시 ‘바다’였다. 직원들은 ‘감정의 바다’에서 일하는 선원이다. 손님의 무례함은 파도와 같다. 이곳들의 파도 역시 좀처럼 멈추는 순간이 없다. 작가는 “누구나 이곳에 감정의 똥덩어리를 잔뜩 싸질러 놓고” 간다고 말한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매일 접하는 곳이지만 작가의 ‘극적인 탈출기’를 보노라면 도심의 꽃게잡이 배와 다를 바 없다.
3부 ‘과자의 집의 기록’은 아산의 돼지농장이 무대다. 헨젤을 잡아먹으려고 살을 찌우던 늙은 마녀처럼, 사람들은 돼지를 살찌운다. 그러나 그곳은 과자의 집과 같은 아늑한 공간이 아니라 똥과 오물로 가득 찬 좁은 우리다. 새끼들이 태어나면, 그중 허약해 보이는 새끼는 내동댕이쳐져 죽임을 당하는 곳이다. 양돈장은 주유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정신을 뒤튼다. 숨이 붙어 있는 새끼 돼지를 ‘버릴’ 때, 죽어가는 돼지의 머리를 쇠파이프로 내리칠 때 당신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는 뜻이다.
4부 ‘면죄부’는 춘천의 비닐하우스에서 지낸 이야기다.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4월임에도 강원도의 밤은 아직 너무나 춥다. 오이들과 함께 비닐하우스에서 잠들지만, 온풍기 바람을 쐬는 건 오이뿐이다. 추위보다 더욱 작가를 괴롭히는 건 암흑과 같은 적막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주인 부부가 지금까지 만난 고용주 중 가장 좋은 사람들이었는데도 생활환경은 가장 열악했다. 작가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최저임금제가 누구를 위한 규칙인지 이해했다. 그것이 노동자를 위한 제도라는 생각이야말로 지독한 환상이다. 최저임금제란, 정부가 고용주에게 발급해 주는 연말정산용 면죄부일 뿐이다.
5부 ‘T. G. I. F.’는 이 책의 마지막 일터인 당진의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의 기록이다. 여기서는 노동을 매개로 얽힌 온갖 아이러니한 군상이 그려진다. 함께 일하는 중국인 동료들을 업신여기는 한국인 노동자들, 업무 특성상 남녀로 양분된 부서 간에 서로 상대편의 급여가 더 높다며 벌어지는 갈등, 혜택은커녕 업무 강도만 세져서 정규직 되기를 거부하는 파견직 노동자들, 동료를 아끼던 이는 해고의 위기에 몰리고, 광기 어린 누군가는 승진하는 상황. 이 모두를 지켜본 작가는 이 노동자들이 실험용 쥐의 등에 키운 인공 장기와 같다고 느낀다. 한국 경제라는 환자를 위해 마음껏 쓰고 버려지는 인공 장기. 생명이지만, 생명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우리도 퀴닝할 수 있을까
에필로그 〈퀴닝〉에서 작가는 다시 꽃게잡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책의 결말이자 작가의 말이기도 한 이 글에서, 작가 한승태는 1부에서 거론한 바닷가 마을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작가의 말마따나, 아무리 힘들었어도 기억은 지나고 나면 좋게 희석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이 왜곡되어도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달라진 것 없는 그곳에서 작가는 결국 도망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달라진 것은 없다. 논픽션과 픽션이 뒤섞인 에필로그에서 작가가 보여준 건 결국 암울한 결말이다. 우리는 과연 퀴닝할 수 있을까. 이런 세상에서 퀴닝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체스의 졸은 한 번에 한 칸씩 전진하는 것밖에 못 하는 가장 약한 말이지만, 그런 졸이라도 상대편 진영 끝에 도달하게 되면 여왕으로 변신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남의 돈을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선, 졸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평생 졸로 머무르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 나는 조금 두려워진다.”(에필로그 〈퀴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