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라는 태양에 달려드는 20세기의 프랑스 지성계, 그 맹목성을 향한 레몽 아롱의 외침
마르크스주의의 왜곡된 군살을 깎아 내림으로서 마르크스 본연의 모습을 통찰하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마르크스 연구자’의 이성적 분석으로 마르크스주의 이해에 대한 균형을 찾는다
레몽 아롱에 의하면 당대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는 크게 두 가지 사조 속에 큰 왜곡을 겪고 있었다. 사실 프랑스가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하기로 한 것은 어쩌면 시대적 요청에 의한 필연적 부응이었을지도 모른다. 18세기의 산업혁명을 거쳐 발전을 거듭한 유럽은 19세기에 이르러 광신에 가까운 낙관론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고도의 발전을 추구했는데, 사실 유럽의 국가들이 성장할수록 한편으로는 빈부의 격차는 심화되고 일부 빈민들은 극심한 억압 가운데 살아갈 만큼 발전의 빛과 어둠은 극명히 나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시대에 인간성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 마르크스주의는 실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대안적 사상의 위치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시대적 어둠에 맞선 탁월하고도 급진적인 사상에 매료된 프랑스 지성계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롱은 이 과정에서 나타난 집착에 가까운 왜곡을 비판하고 나선다.
아롱은 이 도착(倒錯)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의 대표로 장폴 사르트르와 루이 알튀세르를 꼽는다. 더 구체적으로 살피자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퐁티, 그리고 시몬 드 보부아르를 위시한 실존주의자들의 마르크스주의와 알튀세르를 위시한 구조주의자들의 마르크스주의다. 이 두 철학 모두 마르크스-레닌주의, 즉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교조화됨으로써 오도된 것들을 바로잡아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갱신한다는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마르크스주의에만 입각하지 않고 외부적 이론, 가령 현상학 혹은 구조주의에 입각하여 두 이론을 결합한 형태로 이루어짐으로써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아닌, 마르크스주의를 닮은 다른 무엇인가가 되어 버렸다. 정확하게는 마르크스주의의 결론만을 가져와 문제의식의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틀어버렸다. 그럼으로써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요청을 외친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을 개인에 국한되는 문제로 한없이 축소시켰다. 이는 오히려 마르크스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이 마르크스라는 태양을 향해 날아들다 녹아버린 프랑스 지성계의 날개가 와도 같다. 즉, 마르크스주의를 갱신한다는 좋은 의도를 억지로 이루려다가 마르크스주의를 떠난 웃지 못할 해프닝이 된 것이다.
이러한 비판점은 책의 제목에서 무엇보다 잘 드러난다. 역자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책의 제목에서 “신성 가족”이라는 표현을 바우어 형제와 그 추종자들을 비꼬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책에서 바우어 형제와 그 일파, 곧 청년 헤겔 학파를 공격하면서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한다. 이런 공격과 비판에 이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물론적 관점을 수호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청년 헤겔 학파에 속했던 바우어 형제와 그 추종자들, 곧 비판적 신학자들은 국가와 종교를 비판하긴 하지만, 그 비판이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관조와 이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실천 활동에 대한 부정 위에서만 이루어질 뿐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런 의미에서 그들의 책의 제목에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이라는 표현을 넣었으며, 그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비판적 비판”만을 일삼았던 자들을 싸잡아 ‘신성 가족’이라고 조롱하듯이 지칭한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아롱이 현상학적-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제시한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그들의 주위에 있었던 실존주의자들과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확립한 알튀세르와 그의 추종자들을 지칭하면서 “한 신성 가족에서 다른 신성 가족으로”라는 부제를 사용한 것은, 이 두 유형의 마르크스주의가 레닌-스탈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즉 교조화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는 하지만, 마르크스의 저작에 대한 충실한 이해와 해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제대로 된 비판은 아니라는 사실을 반어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그 자체로 모순성을 갖고 있음에도 그 자체로 성역화되어 버린 두 집단에 대한 비판적 어조를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모순성이란 인간성을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에 폭력의 수단을 허용하고 더한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에서의 마르크스주의를 확립하고자 했음에도 자신의 이론 자체도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가졌음을 간과한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모순을 말한다. 이러한 모순이야말로 실천을 외치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무리와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두 무리를 ‘신성 가족’이라고 지칭한 아롱의 반어는 상당히 예리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집단은 그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이행하며 한 ‘신성 가족’에서 다른 ‘신성 가족’으로 이행했을 따름이다.
한편으로는 아롱 자신도 무엇이 바른 마르크스주의라고 구체적으로 제시하거나 밝히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기에는 상당히 많은 도움을 준다. 이는 마치 오답을 분석함으로써 정답의 의미를 찾는 오답노트의 원리와 같다. 물론 아롱의 진단이 모두 옳다고 보증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한편으로는 이 책 출간 이후에, 그러니까 사르트르와 알튀세르의 후기 철학에 이르러 제시되는 그들의 논의는 아롱의 이와 같은 비판을 무색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아롱의 진단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가 ‘왜곡’이라고 말하는 내용들 속에 무엇이 본래적 의미의 마르크스주의인가를 돌아보게 하는 요소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프랑스 지성인이 말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오답’들을 분석하는 방식은 많은 이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마르크스에 대해 새롭게 환기해 볼 만한 계기를 마련해 준다.
아롱 특유의 명쾌하고 시원하되, 반어적으로 유쾌하게 진행되는 서술은 그가 단지 사회학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탁월한 저널리스트임을 잘 느낄 수 있도록 해 준다는 특정이 있다. 다만 때로는 거칠게 요약된 부분 또한 공존한다는 단점도 존재한다. 다만 이런 부분에 대해 옮긴이의 전문적이고 꼼꼼한 각주가 맥락을 잘 잡아 주어 아롱의 전체적인 논지를 폭넓게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반드시 양쪽의 말을 다 들어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마르크스에 대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설명하는 설명 또한 양편을 다 들어볼 필요는 있다. 많은 경우 진보계열에 의해 추앙받던 마르크스, 프랑스 우파 지식인이 말하는 방식을 아울러 살피는 일이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에 과도하게 입혀졌던 과도한 군살을 벗겨 내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폭넑은 이해를 돕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선사하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