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셰익스피어의 화가들’을 알고 관심을 가지게 된 지는 오래되었다. 리버풀 대학교의 방문 연구원으로 《바이런 저널》의 편집장 교수의 지도로 학위 논문을 쓸 때였다. 당시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지도교수와의 면담에는 반드시 지난번보다 발전된 원고를 제출해야 했다. 잠잘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 와중에 시간이 나면 리버풀 부두 가를 거닐었다. 한때 리버풀 항은 아일랜드 정복의 전초 기지로, 또 노예무역의 거점으로 크게 번영했었는데, 그때는 이웃 맨체스터와 함께 영국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로 쇠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웅장한 건물들이 부두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부두 가까이에는 ‘워커 아트 갤러리’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생전 처음 셰익스피어 희곡의 주요 장면과 인물들을 그린 그림들을 보았다. 화가들은 셰익스피어 희곡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 〈오필리아〉, 〈맥베스 부인〉, 〈로잘린드〉, 그리고 〈리처드 3세〉 등이 화폭 속에 재현되어 있었다.
그림 속에는 사랑하는 연인의 손에 아버지를 잃고 실성한 오필리아, 남편을 왕으로 앉히기 위해 욕망덩어리로 변한 맥베스 부인, 가니메데로 변장한 로잘린드, 불구의 성격 파탄자인 리처드 3세 등이 극의 서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화가들의 붓끝에서 생생하게 살아나 희곡을 읽고 막연하게 그려보았던 이미지를 구체화했다. 그것은 슬픔과 아픔으로 넘치는 삶이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서사였다.
워커 아트 갤러리에서 오필리아와 맥베스 부인, 로잘린드, 그리고 리처드 3세를 만나고 난 뒤 틈만 나면 그들을 찾아가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오필리아와 맥베스 부인의 아픔과 욕망이 마치 내 것인 양 여기면서 또 아름답고 현실적인 로잘린드의 용기와 담대함에 힘을 얻기도 하였다. 리처드 3세를 보면서는 조카를 죽일 정도의 잔인무도함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 수 없는 인간성에 놀라워하기도 했다. 회화는 문학과 다른 감상의 즐거움을 주었다. 인물들이 놓여 있는 배경은 인물들이 현재 느끼는 감정과 더할 수 없이 조화로웠다. 회화를 감상하면서 화가들의 조형 의지에 감탄하는 한편 그들을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 후 셰익스피어 희곡을 그린 회화 자료를 틈틈이 찾아보고 모으고 정리했다.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은 자연스럽게 화가의 화집 수집과 미학 이론의 공부로 이어지게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 자료들이 쌓이자 구슬을 꿰어 보석을 만들어 독자들과 공유하고픈 소망이 싹텄다. 이 책은 그렇게 탄생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화가들』의 머리말을 쓰다 보니, 이 책은 이미 리버풀 워커 아트 갤러리에서 싹이 튼 셈이니, 그 세월이 어느새 20여 년이 지났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여전히 우리의 인생처럼 불가해한 부분이 있으며 그의 희곡을 그린 화가들의 그림도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준다. 그렇기에 예술은 늘 호흡하는, 늘 새로운 그 무엇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화가가 셰익스피어 희곡을 화폭에 옮겼다. 잠시 손꼽아 봐도, 영국의 라파엘 전파 존 에버렛 밀레이, 프랑스 낭만주의 대가 외젠 들라크루아, 상징주의 오딜롱 르동, 스위스 화가 헨리 푸셀리, 미국 초상화의 대가 존 싱어 사전트 등을 들 수 있으며, 영국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도 셰익스피어의 화가들에 포함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 희곡을 그린 그림들은 극 작품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화가들은 셰익스피어가 낳은 셈이다. 셰익스피어 희곡의 명장면과 인물들은 화가들에게 영감의 숨결을 불어 넣었고 화가들의 화폭에서 비로소 불멸의 이미지로 활짝 피어났다.
『셰익스피어의 화가들』은 비극, 희극, 사극을 포함한 총 3부작으로 기획되었다. 이 책은 그 1부에 해당하는 ‘비극편’으로 셰익스피어 4대 비극으로 손꼽히는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의 명장면과 주요 인물들의 그림을 소개하여 극의 서사와 함께 감상하고자 하였다. 4대 비극은 내용뿐 아니라 주인공의 성격 창조가 탁월하여 현재에도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작품들이다. 이들 비극의 각 막과 장에는 주요 사건과 주요 인물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햄릿과 아버지 유령과의 만남, 고뇌하는 햄릿, 오필리아의 광기와 익사,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극명한 흑백 대비, 이아고의 치밀한 간계, 오셀로의 질투와 데스데모나의 살해, 리어왕의 어리석은 판단, 폭풍 속의 리어왕, 코델리아의 죽음, 그리고 맥베스의 권력욕과 그에게 욕망을 불어넣는 세 마녀, 맥베스 부인의 죽음 등이 그것이다.
셰익스피어 비극을 그림으로 감상하는 묘미는 그림의 제목을 보면 그 그림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를 독자는 이미 알고 있다는 데 있다. 화폭에 재현된 인물들과 명장면들은 불멸의 삶을 획득하여 독자에게 대화를 요청한다. 화면 하나하나는 퍼즐 조각처럼 파편적이지만 극의 흐름에 따라 배열된 그림은 완성된 퍼즐처럼 희곡 전체의 서사 또한 완성한다. 독자는 작품의 주제별로 분류되고 극의 진행에 따라 배열된 그림을 감상하노라면 어느덧 비극의 줄거리와 함께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회화를 감상하는 데는 문학과 마찬가지로 독자만의 독자적인 관점이 있지만 가장 단순한 방법은 그림을 보고 느끼는 대로 감상하면 족하다는 것이다. 독자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보고 느끼며 해석할 권리를 가진다. 그것은 일종의 ‘독자 반응 비평’에 속하는 독자의 고유한 영역이다. 이 책은 셰익스피어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술서적이 아닌, 조형 예술로 셰익스피어를 읽는 즐거움을 주기 위한 목적이기에 독자는 회화를 통해 셰익스피어 비극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리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셰익스피어의 화가들』이 출간되기까지 많은 분의 도움이 있었다. 가장 먼저 아르메니아 화가 멜릭 카자리안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화가는 한국 독자와의 만남을 기뻐하며 기꺼이 〈리어왕〉 〈그림 75〉을 이 책에 실을 수 있도록 양해해주었다. 화가의 〈리어왕〉은 비극을 행복하게 표현하여 마치 축제의 한 장면 같은 그림이다. 화가는 개인계정을 밝히며 한국 독자와 소통하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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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책이 출간되기까지 청어 출판사의 편집부 여러분의 친절하고 크나큰 노고에 감사드리며 이영철 대표님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갑진년 봄
김 현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