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읽게 된 핑크의 설교 말씀은,
내게 “번쩍이는 빛처럼” 크나큰 도움을 주었다! _마틴 로이드 존스
하나님의 ‘숨은 보석’이자, 평생을 성경연구에 바친 위대한 성경학자 아더 핑크의 전기이다. 핑크가 1922년부터 발간한 월간지 「성경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는 영어권 그리스도인들이 스펄전 시대 이래 거의 들을 수 없었던 복음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핑크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저작들이 재발행되면서 아주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게 되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더글라스 존슨을 포함하여 교리적 기독교 신앙으로의 복귀를 주도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핑크는, “사후에 그의 저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20세기 후반에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저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 책은 이안 머레이가 1981년에 출간한 초판에 새롭게 발견한 핑크의 원고와 그 밖의 자료를 반영한 개정증보판으로, 강인하면서도 복합적인 인물, “진리의 용사”이면서 겸손한 그리스도인이었던 한 인물의 흥미로운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더 핑크의 생애뿐 아니라 동시대의 사상과 상황들이 역동적으로 펼쳐져 있어, 한결 흥미로운 핑크의 전기로 인정받고 있다.
■ 특징
- 아더 핑크의 삶, 신앙, 신학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다.
- 아더 핑크의 생애과 활동을 생생히 보여주는 사진, 연보 수록
- "하나님의 사람 시리즈" 12권
■ 독자 대상
- 아더 핑크의 삶과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픈 독자
- 진리를 품은 한 인물이 어떻게 온 세상에 영향을 주는 인물로 변화되어 가는지를 알고 싶은 그리스도인
- 신학자와 더불어 말씀을 선포하고 전하는 목회자, 신학생, 선교단체 간사
아더 핑크(Arthur W. Pink, 1886-1952) 연보
1886년 4월 1일│잉글랜드 중부의 노팅엄에서, 자영업자이던 아버지 토머스 클레멘트 핑크와 벨퍼 출신 어머니 아그네스 헌트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핑크는 독실한 신앙을 가진 부모로부터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열여섯 살까지 학교를 다녔다.)
1902년│어린 나이에 ‘청소년 사업가’로 자리를 잡다.
1908년│22세에 자신의 침실에서 온전한 회심을 경험하다. (당시 사이비 종파인 신지학회에 깊이 빠졌던 그를 돌이킨 것은, 아버지가 전해 준 잠언 14:12 말씀이었다.)
1910년 6월│영국을 떠나 미국 시카고에 있는 2년 과정의 무디 성경학교에 들어가다. 6주가 지난 후, 성경학교를 떠나 목회를 시작할 것을 결심하다.
1910년 8월│콜로라도 주 실버턴의 회중교회에서 2년간 목회하다.
1913년│캘리포니아(두 번째 목회지로 추정)에서 영국으로 돌아와 18개월간 머무르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그 전쟁이 일으킨 모든 흥분을 목도하게 된다.)
1915년│미국 켄터키 주 버케스빌과 올버니에서 1년간 목회하다.
1916년│30세의 늦은 나이에 켄터키 출신의 베라 러셀과 결혼하다. 켄터키 주 스코츠빌에서 목회하다.
1917-1920년│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스파턴버그의 노스사이드 침례교회에서 목회하다.
1918년│「하나님의 주권The Sovereignty of God」이 출간되다. (이 무렵, 핑크는 점점 더 청교도 고전을 탐독하게 된다.)
1920-1921년│미국 동부의 여러 주와 서부의 캘리포니아 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설교와 성경연구를 병행하는 ‘순회 설교자’로 활동하다.
1922년│사설 월간지 「성경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를 발행하기 시작하다. (영어권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배부된 이 잡지를 통해 독자들은 스펄전 시대 이래 거의 들을 수 없었던 복음을 깨닫게 된다.)
1925년 3월│호주 시드니로 이동하여 여러 집회와 함께 시드니 벨브와 가 교회와 독립교회에서 3년간 목회하다.
1928년 7월│영국으로 돌아와 8개월 동안 머물며 설교자로 일하기를 바랐으나 자리를 얻지 못하다. (이후 1936년까지 핑크 부부는 열두 번이나 거처를 옮기며 살아야 했다.)
1929-1930년│켄터키 주 모턴스 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내다. “우리는 1930년 한 해 동안 어느 교회에도 속해 있지 않았고, 날이 갈수록 사람들을 점점 더 보기가 어려웠다.”
1931-1934년│동부 펜실베이니아로 근거지를 옮겨 연구하고 집필하다. (이때는 미국이 경제 대공황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1934년 9월│영국으로 귀국하여 첼트넘, 글래스고, 호브에 정착하여 책을 집필하고 「성경연구」를 발행하는 일에 몰두하다. “마침내 말씀을 전할 기회를 찾으려는 모든 희망과 노력을 단념하고, 모든 공중 활동에서 물러났습니다. 이제 나는 잡지 발행이라는 이 행복한 사역과 그에 따라 발생하는 편지 왕래에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으려고 합니다.”
1940년 11월│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안전하고 조용한 사역을 위해 영국 북서부 루이스 섬의 스토너웨이로 이사하다.
1952년 7월 15일│“성경이 스스로 그 뜻을 분명히 드러내는구나”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66세의 나이로 이 땅에서의 ‘순례 여행’을 마감하다. (그는 자신의 묘비를 세우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겨 스토너웨이 샌드위크 묘지에 묘비 없이 묻힌다.)
핑크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그의 저작들을 여러 출판사에서 재발행하게 되고, 그 결과 아주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게 된다. 마틴 로이드 존스, 더글라스 존슨을 포함하여 교리적 기독교 신앙으로의 복귀를 주도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핑크는, “사후에 그의 저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20세기 후반에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저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 추천사
우연히 읽게 된 핑크의 설교 말씀은, 내게 ‘번쩍이는 빛처럼’ 크나큰 도움을 주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
핑크의 글들은 내가 성경을 연구하면서 가장 즐겨 읽었던 책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피상적이고 가치 없는 신앙고백이 횡행하고 사람의 지혜를 높이던 인간 중심의 시대정신에 타협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매진했다. 그렇게 연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그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를 지칠 줄 모르고 힘써 전달함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들의 삶의 거룩함을 증진시키는 일에 한평생을 드렸다. 20세기 복음주의 저자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던 핑크의 생애가 조국교회로 하여금 진리를 위해 불붙게 하는 일에 귀하게 사용되리라 확신한다.
화종부│남서울교회 담임목사
국내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처음 번역된 이래 40년 넘는 세월 동안 핑크의 수많은 저서들이 출판되어 많은 독자들에게 유익을 끼쳐 왔다. 우리는 핑크의 저술 속에서 성경적이고 청교도적인 전통을 풍성하게 접할 수 있다. 또한 신앙의 성장을 위해 단단한 식물을 찾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고영양가의 풍성한 먹거리를 제공한다. 우리 시대 가장 탁월한 전기 작가 중 하나인 이안 머레이가 섬세하고 감동적인 필치로 쓴 이 전기의 일독을 강력히 권한다.
이상웅│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머레이가 쓴 전기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이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모든 전기를 개혁신학의 핵심 구호인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관점으로 평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핑크의 전기도 예외가 아니다. 이 책은 결코 영웅전이 아니다. 감동적이지만 동시에 비판적이다. 분명한 원자료에 근거한 학문적 저술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 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한 사람, 아더 핑크의 신앙적인 희로애락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황대우│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아더 핑크는 성경의 참 의미와 교리의 미묘한 차이, 그것의 적용을 세심히 밝히기 위해 전력한 성경강해의 권위자다. 따뜻하고 긍정적이며 대담하고 명쾌한 그는, 확신과 설득력 있는 통찰로 저술한다. 그의 저작은 오늘날 기독교에 퍼져 있는 피상성과 어리석음을 해결할 완벽한 해독제다.
존 맥아더
50년이 넘는 목회 사역 동안 나는 내 세대의 많은 목회자들처럼 핑크의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외,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마음, 순종의 실천에 대한 강조는 나의 성경연구와 설교, 그리고 내 개인적인 삶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워렌 위어스비
우리는 핑크를 우상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그의 저작과 삶을 통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는 하나님의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정말로 “타고난 작가”였다. 그는 삶의 모든 환경에서, 심지어 그 의도를 알지 못한 부정적인 환경마저도 발판으로 삼아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그 목적을 이루었다.
리처드 벨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