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
상을 받은 책, 비싼 종이를 사용한 책, 표지가 화려한 책…. 좋은 책을 정의하는 기준은 다양하겠지만, 책을 만드는 출판사 대표 입장에서는 독자들이 실질적으로 원하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22년 정소희 교수님의『초견능력 향상을 위한 대금 연습곡집 I』을 만들고 나서 2년 동안 거의 모든 아침에 이 책의 제목을 입력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출판사에서는 매일 아침이 되면 어제 독자 분들이 구매한 책을 서점에서 확인한 후 출판사의 물류센터에서 전국으로 출고하는 발주작업을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 회사에서 출판된 책 중에 어떤 책들이 실제로 독자들의 선택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분초를 다투는 삶에서 그 작업을 매크로를 써서 자동화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자동화 시스템이 등장했다고 해도 직접 독자들이 선택한 책을 확인하고 입력하는 기쁜 시간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업무상 광화문의 대형서점에 들를 일이 종종 있다. 우리 회사 책이 매장에‘있는지’,‘없는지’를 확인한 후에는, 습관처럼 책이‘누워’있는지,‘서’있는지를 확인한다. 우리의 눈은 좀처럼 쉴 수가 없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도 스마트폰 화면을 응시하거나 광고를 보거나 타인을 보거나 아무튼 뭔가를 보느라 바쁘다. 그렇게 바쁜 사람들의 눈동자를 붙잡기 위한 시도는 지극히 정량적이다. 배너광고 하나도 크기를 셈하고 면적당 단가를 계산하는 세상인데, 수십일의 밤과 낮을 바쳐 공들여 만든 책이 책등만을 보이고 있으면 맥이 풀린다. 그러나 책이‘누워’있으면 표지를 비롯하여 드러난 면적만큼의 정보량이 독자에게 전달된다. 이런 실정이다보니 시장에서 독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책은 어느 순간 매장에서 가느다란 책등만큼의 면적도 차지하지 못한 채‘빠진다’. 방을 빼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멀고 깊은 창고에 있다가 누군가가 주문을 할 때에만 뜸하게 발송이 되는 운명을 맞고 만다.
이 책은 한 번도 매장에 없던 적이 없었다. 주차가 필요해서 서점에 들렀을 때조차 잠깐 슬쩍 그쪽 서가를 바라보기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이 책은 너무나 그 자리에서 확고하게 늘 나를 보며 말없는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책을 원하는 독자들이 선명하게 있다는 증거다. 그것은 숨가쁘게 바쁜 삶을 살면서 잠시 사정상 출판을 못하고 있을 때에도 마치 내가 이 사업을 계속해도 되는 것 같은 격려와 안심, 어떤 보장감을 주었다.
2016년 출판사 토일렛프레스를 창업했다. 국악분야 책의 출간을 시작하게 된 건 대금을 전공한 정재우 前공동대표 덕분이다. 2018년 정재우 대표를 통해 대금의 청신한 음색을 처음 알게 되었고, 동시에 대금의 정중함에 매료되어 악기를 배우게 되었다. 그런데 높은 소리인 역취 소리는 비교적 잘 내는데 중간 소리인 평취 임(林) 소리를 잘 내지 못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대금이라는 근사한 악기를 배우고 익힐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초견능력 향상을 위한 대금 연습곡집 I』에‘이 책에는 E♭조와 A♭조의 정악대금 연습곡들이 담겨있다. 초보의 시작을 초보의 입장에서 고민한 책이다. 덕분에 가장 편안하게 시작을 시작할 수 있다.’라고 썼다.‘내가 초보였을 때 이 책으로 공부했으면 조금 더 대금을 오래 배울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문장을 수십 번 고민하다 쓰지 않았다. 나는 산조대금만 연주해 보았기 때문이다.
정소희 교수님은 첫번째 책을 펴내며 저자의 글을 통해 『초견(初見, sight-reading)이란 악보를 보고 바로 부르거나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며 ‘초견 능력은 연주가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고, 선천적인 소질에 의한다기보다는 후천적인 연습에 의해 발달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초견 능력 향상을 위한 대금연습곡집 II』은 독자분들의 후천적인 연습에 함께 하며 ‘바로 보고 알 수 있는 능력’을 전보다 더 다듬을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다. 20세기 중반부터 대금으로 접근 가능한 음악세계가 매우 확장되었다. 실제로 곡을 만드는 작곡가들은 실험적인 시도를 향해 용기를 내고, 대금을 무대에서 연주하는 프로음악인들은 전보다 정밀하고 다채로운 연주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이 세계를 동경하여 지향하는 학생은 초견능력향상에 대한 절실함을 갖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시대의 요구를 정확히 관통하는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오래 사랑받고 당당히 세상의 빛을 보는 책을 만들 기회를 주신 정소희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실제로 이 책으로 초견능력 향상을 이루고 어느새 중급자, 고급자, 최고급자에 다가서는 독자 분들께 응원과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2024년 4월
- 토일렛프레스 대표·편집자 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