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교수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김구 선생에 관한 문제별, 사안별, 시대별 따위의 단편적 전기가 아니라, 긴 생애의 시ㆍ공간적 행적을 씨줄로 하고 그의 내면적 성찰과 정신ㆍ사상적 궤적을 날줄로 엮은 총체적 서술”이라면서 “그 시기 이 민족의 값진 선각자들이었던 많은 애국지사들을 아울러서 거대한 만화경으로 제시해 주는 놀라운 저술”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실 백범 김구 선생과 관련된 연구만 해도 도서관을 지을 정도로 방대할 뿐 아니라 근현대사를 통틀어서 이 만큼 우리의 정신과 사상을 지배하는 인물도 드물다. 그러나 이런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단지 선생을 혁명가와 독립투사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나 이 책은 백범 선생이 민족의 장래를 위해 이미 광복 전에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한 건국강령을 만들어 사회주의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들의 임시정부 참여를 유도했다는 점과, 아울러 선생의 연설과 언론 기고문, 어록 중에서 문화 사상과 관련한 부분을 발췌하여 선생의 애국 정신, 민주주의 정신, 통일 사상과 궁극적으로 우리나라가 지향해야 할 ‘문화국가론’의 편린을 살펴보고 있다. 선생이 서거한 지 55년이 지난 시점에도 이와 같은 근본 사상이 바로 우리의 민주주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니 선생의 위대한 정신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한편 백범 김구 선생과 관련해서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선생의 서거와 관련된 일련의 내막일 것이다. 이 책은 지난 1995년 13대 국회에서 ‘백범김구선생암살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국회에 보고한 〈진상조사보고서〉 가운데 암살 배후와 관련된 부분을 싣고 있다. 보고서는 안두희의 단독 범행이 아닌 면밀하게 준비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다만 이승만의 사전 개입과 지시는 불투명하고, 미국의 역할에 있어 암살에 대한 구체적 지시나 명령을 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물론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민간 부분(역사가)에서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을 더 한층 촉구하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삶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자주 평화통일에 모두 바치신 민족의 지도자이며 겨레의 큰 스승이시다.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에서 극빈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교육을 받았으며, 1893년 동학에 입도하였고, 1894년 팔봉접주(八峰接主)로 임명되었다. 황해도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하였다. 동학농민운동 후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머물면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에게 유학을 배웠으며, 만주지역을 시찰하다 의병활동에 가담하였다. 1896년에는 치하포에서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일본 육군중위 스치다(土田讓亮)를 처단하고, 체포되어 인천감리서에 투옥되었다. 선생은 옥중에서 신서적들을 읽고 개화사상을 키웠으며, 탈옥 후 승려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899년 환속한 후에는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신교육운동에 노력하였다. 또한 1905년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비밀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하다가, 1911년 안악사건 105인사건 등으로 수감되었다. 1915년 출옥한 후에는 동산평농장의 농감생활을 하며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임시정부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 등을 역임하면서 당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임시정부를 지키고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진력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1932년의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일으켜 내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선생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피신생활을 하면서, 한인청년들을 중국군관학교에 입학시켜 군사훈련을 받게 하는 등 다가올 독립전쟁에 대비하였다.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한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主席)으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군사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이루었고, 연합국으로부터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는 등 항일운동의 최선봉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1945년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선생은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결정된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민족 스스로의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에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 소위원회의 결의에 반대하며, 남북한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의하고, 평양에서 "남북조선제정당 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이후 선생은 민족통일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다가, 1949년 6월 26일 통일운동을 저해하려던 세력에 의해 암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