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겪어낸 좌절과
열리기 시작한 “두 번째 삶”
레이먼드 카버가 ‘이야기’를 발견한 것은 어릴 적 아버지가 책을 읽는 모습에서 “사적인 행위”를 본 순간이다. 사적인 영역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가난한 집안에서 독서는 그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어떤 것으로 보였고, 카버는 책을 읽고 또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갔다. 그러나 열여덟이라는 어린 나이에 했던 결혼과 곧이어 태어난 두 아이는 글쓰기보다는 먹고사는 일에 매진하게 했으며, 그에게 예술이란 “그렇게 할 만한 여유가 있을 때 추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일을 하는 틈틈이 차에 나가 앉아 무릎에 노트를 올려두고 글을 쓰던 그였지만, 이후 겪게 된 알코올의존증은 삶을 황무지로 만들어버렸다.
지금은 희망이라는 게 있지만, 전에는 특히 믿음과 연결되어 있는 의미에서의 ‘희망’이란 건 저한테 없었어요. 지금은 세계가 오늘 나에게 존재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내일도 존재하리라는 걸 믿어요. 전에는 이런 믿음이 없었죠. 아주 오랫동안 저는 아주 즉흥적으로 살았고, 술 때문에 저 자신과 주변 사람들 모두를 끔찍한 곤경에 몰아넣었어요.
-189쪽
그러나 카버가 온몸으로 겪어낸 좌절들은 그로 하여금 세상의 “더 낮은 곳”에 놓인 이들을 주목하게 했다. “작가는 그보다 더 할 수도 있습니다. 더 낮은 곳에 시선을 둘 수도 있다는 거죠.” 그의 인물들이 “너무나 무력”한 점에 대해, 이를테면 “고장 난 냉장고를 고치는 대신에 불평만 하고 앉아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카버는 무언가가 고장 났을 때 그걸 고치거나 새로 살 돈 같은 건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대답한다. 이들은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난한데, 오랜 시간 그의 편집자이자 친구로 함께한 고든 리시의 말에 따르면 카버는 그런 누추함을 “찬양”하고, 나아가 “어느 누구도 시도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시적인 것으로 만들어”낸다.
어떤 인생들에서는 사람들이 늘 성공을 거두죠. 그리고 그렇게 되는 건 정말 근사한 일이에요. 다른 인생들에서는 사람들이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크고 작은 것들을 아무리 원하고, 그걸 이루기 위해 애를 써도 성공을 거두지 못해요. 그리고 물론, 이런 인생들이 써야 할 가치가 있는 인생들이죠.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인생이요. 제가 해온 대부분의 경험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이 성공하지 못하는 인생과 관련 있어요.
-89쪽
그가 ‘두 번째 삶’이라 부르는, 알코올의존증에서 벗어난 삶이 펼쳐지면서 카버의 작품에는 가느다란 희망과 동정심이 더해진다. 그 스스로 “마음을 열어주는” 과정이었다고 말한 「대성당」이 대표적인 예다. 변화한 환경과 건강해진 정신이 그를 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전망”으로 이끌었다고 이야기하는 한편, 언제든 “상상의 문”을 열면 여전히 절망의 “질감”도 떠올릴 수 있다는 그에게서 더 다양한 세계를 그리게 된 작가의 기쁨이 느껴진다.
“쓰지 않는 건 상상할 수도 없어요”
집요한 쓰기에서 탄생한 문학적 증언들
카버의 소설이 그토록 독특한 스타일을 지닌 이유는 그만의 어조 덕분인데, 그에게 어조란 “작가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그는 “비아냥거리”지 않으며, 등장인물들을 무시하거나 “깎아내리”지 않는다. 그는 이 세계의 ‘증인’으로서 이야기를 전달한다. 소설의 영향력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좋은 소설이 하는 일 중 하나는 한 세계의 소식을 다른 세계로 전해주는 거예요.”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예민하게 포착하며, 그것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어느새 소설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삶이 “메아리처럼” 되돌아오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카버의 문학은 “한 줄 한 줄 모두 진실”일 수밖에 없다.
쓰지 않는 건 상상할 수도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 하나도 없다고 느끼게 될 때에는 예외겠지만요. 그렇게 되면 물론 그만 쓰게 되겠죠. 하지만 제가 쓸 수 있고 무언가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느끼는 한, 계속할 생각입니다.
-354쪽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기 위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다. 글을 쓸 때면 전화선을 뽑아놓고, 문에 ‘방문 사절’ 표지판을 걸어두고, 자신 외에는 아무것에도 귀 기울이지 않은 채 쓴다. 사망 직전까지 이어진 인터뷰에서조차 카버는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내비쳤다. “끝내야 할 책이 한 권 있어요. 회고록(믿어져요?)을 써야 하고, 출판해야 할 시들도 있어요. 전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글쓰기와 현실의 경계를 허물며 그가 쌓아 올린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문학적 증언으로 남았다. 그 열렬한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이 인터뷰들은 그 자신과 더불어 이 세상의 소외된 모든 이에게 목소리를 주고자 했던 한 작가의 귀중한 기록이다. 이 사려 깊은 목소리를 통해 그동안 이해하기 어려웠던 삶의 귀퉁이들을 이해해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