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적 아이러니가 숨쉬는 궁궐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파괴되자 광해군은 창덕궁을 재건하고 새 궁궐을 영건할 계획을 세운다. 당시 정원군(인조의 생부)의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이야기를 매우 싫어하여 그 집을 철거하고 경덕궁이라는 궁궐을 지어 그 터의 왕기를 누르기 위해서였다. 새 궁궐 경덕궁은 광해군 9년(1617)부터 짓기 시작하여 인경궁, 자수궁과 함께 광해군 12년(1620)에 완공되었다. 그런데 경덕궁의 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갈 무렵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폐위되었고 인조가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부터 궁궐을 짓기 시작한 광해군은 정작 자신이 지은 경덕궁에도 임어하지 못한 채 폐위되고 만 것이다.
자정전에서 태령전으로 넘어가는 중간 언덕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원래 왕암(王巖)으로 불렸다.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의 말로 인해 광해군이 이곳에 경덕궁을 짓게 된 것인데, 결과론적으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왕위에 올라 경덕궁을 대궐로 사용하고, 생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였으니 상서로운 바위가 있는 집터가 두 명의 왕을 만든 셈이 되고 만 역사적 아이러니의 현장이라 할 만하다.
2. 경희궁을 사랑한 사람들
인조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차례로 소실된 상황에서 규모가 작은 경덕궁에만 10년 가까이 머물렀고, 규모가 크고 화려한 인경궁 건물을 창덕궁과 창경궁 복구에 활용하게 된다.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잠시 강화행궁으로 피난을 갔다가 다시 경덕궁으로 돌아와서 인조 10년(1632)까지 경덕궁을 떠나지 않았다. 이후 조선 후기 왕들은 경덕궁을 이궁으로 사용하였는데, 영조는 국왕으로서 경희궁에 가장 오랜 기간 임어하였다. 1760년(영조 36)부터는 치세의 거의 대부분에 해당되는 시간을 경희궁에서 보내고 1776년 집경당에서 승하였다. 영조가 경희궁에 있었던 기간은 여러 국왕 들 중 가장 긴 시간으로 무려 19년 4개월이었다. 왕세손 시절 정조는 경현당에서 조참(朝參)을 하고, 평소에 신하를 만나 정치적 논의를 행하는 정무 장소로 존현각을 활용하였는데, 정조 즉위년 괴한들 존현각으로 침입해 들어와 정조 암살을 시도한 정유역변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경희궁의 전각으로는 흥정당, 왕과 왕비의 침전인 융복전과 회상전,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 편전인 자정전, 대비전인 장락전 등이 있었으며, 후원 영역도 상당히 넓어 현재의 성덕미술관이 위치한 곳까지 걸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후원에는 춘화정과 영취정, 그리고 송단이 있어 바쁜 정사에 왕들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