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적인 인격’으로서의 장일순의 삶과 사상을 따라 함께 걷다
지은이는 무위당 장일순의 평전을 쓰기로 하고 나서 생각에 생각만을 거듭하며 십여 년을 뒤로 물러나 앉아 있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많은 구술 자료들이 쌓이고 〈무위당사람들〉과 2019년 두레판 『장일순 평전』등에 힘입어 자신의 원고를 마무리할 수 있었으니 이 책, 『장일순 평전 - 걸어 다니는 동학, 장일순의 삶과 사상』은 지은이 개인의 성과물이 아니라 ‘그동안 장일순 선생님과 호흡을 나누었던 많은 분들이 함께 지어낸 공동 저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일순을 이해하려면 장일순 한 사람의 이야기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이를테면 ‘원주가 민주화운동 의 성지聖地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낮추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돌보고 기르는 일에 매진해 온 수많은 분들과 그분들 사이의 관계가 있고, 이를 토대로 하나의 공간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며 “아우들이 날 무등 태워 가는 거지. 난 아무것도 아냐”라고 했던 장일순의 말을 되새겨보아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 책은 무위당이 온몸으로 살아왔던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단순히 시간적 순서에 따라 기술하지는 않는다. 당시의 시대 상황 속에서 장일순을 ‘둘러싼 운동 역량과 대중과의 관계를 전제하지 않으면 잡히지 않는 바람 같은 분’이라는 김지하 시인의 말에 공감하면서 지은이는 결국 장일순의 삶과 사상은 함께 일했던 많은 이들이 민중과 더불어 시대적 과제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게 옳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에는 장일순과 관계를 맺은 많은 사람들의 많은 일화들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분명 주연은 있으나 조연들 역시 각자 중요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배우들이 각자의 역할과 개성이 살아 있는 드라마가 연상되기도 한다.
서예가이기도 했던 장일순은 생전에 2,000점이 넘는 서화 작품을 남겼지만 한 점도 돈을 받고 서화를 판 적이 없었다. 1980년대 초반, 원주 옛 시청 사거리에 있던 합기도장 ‘흑추관’ 관장인 김진홍이란 사람의 이야기다. 도장을 열었지만 관원이 없어 형편이 어려워 지인들에게 생계의 어려움을 토로했더니 다들 장일순 선생을 찾아가 보라고 권했다. 김진홍이 봉산동 집에 찾아가 “선생님, 저 좀 먹고살게 해주세요.” 부탁했더니, “내가 백수인데 무슨 수로?” 하면서 합기도장이 어디냐고 물어본 뒤에 돌려보냈다. 다음 날부터 장일순은 날마다 흑추관에 찾아가 아무 말 없이 도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그러니 봉산동으로 장일순을 찾아왔던 이들이 이젠 합기도장에 가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장일순은 그네들에게 “우선 도복부터 입어!” 하였다. 그렇게 도복으로 갈아입고 장일순 주변에 앉아 합기도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 스무 명 남짓 되었다. 그렇게 합기도장이 살아났다. 이때 김진홍에게 장일순이 써 준 글이 ‘눈물겨운 아픔을 선생이 되게 하라, 진홍아, 이렇게 가보자’였다고 한다.
『장일순 평전 -걸어 다니는 동학, 장일순의 삶과 사상』은 보통의 평전들과 조금은 다르다. 장일순 평전임에도 그의 가족, 친구들,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 분량이 많은 편이다. 이 책에는 장일순과 관계 있는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 속의 알 만한 인물들의 이야기들과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범부들의 사소한 이야기들이 우화처럼 섞여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들은 모두 장일순의 삶과 사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한 마디로 장일순은 ‘참 착한 사람’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의 서문 끝에, “개문유하開門流下. 문을 열고 아래로 흘러라 하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을로 흘러가 ‘착한’ 결실을 맺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서 아름답고, 그래서 거룩한 마음이 발생하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습니다.”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