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인 ‘우리를 읽은 책들’은 이윤영이 쓴 서문에서 그 의미와 기원을 잘 알 수 있다. 어떤 책들은 내가 찾아서 읽기 전에 나를 찾아온다. 흔히 상업적으로 떠드는 ‘이 시대의 필독서’ 같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어느 시기, 우리를 찾아와 “우리와 함께 살면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며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된 책들.”
아마도 1980~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지금의 중장년들. 이 책의 목차에서 그 시절 대학가 서점에서 얼핏 제목이라도 익힌 책들을 떠올린다면, 그 책들은 설령 내가 펼쳐 읽지 않았어도 그 시대의 나를 읽은 책들이다. 그 시대의 지적 자장을 통과한 모든 이들에게 이 서평집은 ‘젊은 날의 나’로 향하는 단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젊은 날’이 그저 ‘지난날’일까. 책과 사상의 생명력은 길다. “세계를 보는 법을 바꿔 놓아서 시대의 이정표가 된 책들”, 그래서 “우리를 키웠다고 할 수 있는 책들”은 쉽게 늙지 않는다. 내가 젊은 날, 제목만 읽고 지나친 책들이 여전히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충동하기도 한다.
‘우리를 읽은 책들’이 이 책에 담은 23권에 그칠 리가 없다. 당신을 읽은 책들은 더 많고 또 다를 것이다. 어쨌거나 다시 읽기. 시대를 넘어 세대를 거쳐 다시 읽고, 또 읽어야만 하는 책들이 있다. 이 서평집이 당신을 새롭게 충동하기를. 당신을 읽은 책들을 찾아 아직 젊은 당신과 다시 만나기를.
시대의 좌표를 이룬 책들
‘안쪽으로’ 11권의 책들
책의 1부는 이윤영이 다시 읽은 한국인 저자의 책 11권으로 꾸몄다. 글 쓸 때 분야를 분류할 의도는 애초에 없었지만, 서평의 대상은 시인과 소설가의 문학작품이 4권(조세희, 김수영, 박상륭, 김석범)이고, 인물과 시대의 기록이 4권(김윤식, 조영래, 조은, 손정목), 문화와 삶에 대한 글이 3권(최순우, 이오덕, 법정)이다.
이윤영의 문학비평은 작가들의 언어를 세밀하게 분석하면서도 작품을 낳은 시대에 대한 조망을 품고 있다. “서평이 초역사적 위치를 점하지 않도록 가급적 현재 한국사회의 상황과 연동시키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는 스스로의 원칙에 따른 것이나, 그래서 ‘지난날의 책’이 ‘젊은 날’의 우리를 읽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오늘날의 사회’를 읽고 있다는 점을 의식한다.
“조세희의 연작 소설들은 1975년과 1978년 사이에 쓰여졌지만, 40년이 훌쩍 넘게 지나도 어떤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거의, 또는 전혀.” (18쪽)
“현재의 역사를 과거사로 환원할 수는 없지만, 과거사가 현재의 역사에 빛을 비춰줄 수는 있다.” (85쪽)
이광수의 친일(김윤식), 전태일의 분신(조영래), 가난에 대한 탐구(조은), 서울에 대한 기록(손정목)을 다룬 글에선 지금의 한국사회와 한국인을 이루는 심성, 계급구조, 공간과 시간 감각을 되짚는다.
문화와 삶에 대한 서평에서도 그 책의 저자들이 당대와 투쟁했던 일들을 환기하며, 당시 어떤 독자들은 알았지만 이제는 많이 잊혀진 역사를 오늘의 독자들을 위해 소환한다.
하지만, 그리하여 이윤영의 서평 11편이 그 시대의 책 11권을 들어 한국의 근현대사를 논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지나간 시대를 기억할 때, 어떤 대통령 시절이었는지 무슨 정치적 사변이 있었는지를 들 수도 있고 어떤 최신의 전자제품이 나왔는지 무슨 노래가 유행했는지를 기준 삼을 수도 있겠지만, 이윤영의 글은 지금의 나를 이룬 것은 그런 정치나 상품만이 아닌 그 시대의 책, 그 시대를 앞선 예리한 지성, 그래서 어쩌면 지금도 기억하는 하나의 문장이기도 했었구나, 하는 것을 일깨워 준다. 그렇게 기억하는 역사가 오롯이 나의 것이다.
‘우리를 읽은 책들’을 다시 펼쳐주는 글이 고마운 이유다.
다른 시대, 다른 나라 ‘책과의 우정’
‘바깥으로’ 12권의 책들
책의 2부는 이상길이 다시 읽은 외국 저자들의 책 12권으로 꾸몄다.
문화연구의 ‘창설 텍스트’로 꼽히는 리처드 호가트(『교양의 효용』)에서부터, 역사(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사’,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미시사’), 자본주의와 현대사회 분석(앙리 르페브르의 ‘일상성’,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 어빙 고프먼의 ‘자아연출의 사회학’), 지식의 탄생과 작동방식(미셸 푸코의 ‘권력과 지식’,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 이론’)을 망라하며 문화연구의 핵심적 저작들을 모았다.
한국에선 주로 1990년대 이후, (남한 사회에서만의) 격렬한 이념 투쟁을 동구권의 몰락과 함께 청산하며 뒤늦게 지식사회를 유혹한 ‘서구권’의 ‘포스트모더니즘’ 조류라고 흔히 오해되는 저작들이다. 문화연구자이자 꼼꼼한 번역자로서 이상길은 이 12권의 ‘외국서적’이 출간된 과정과 국내 수용의 배경을 서평마다 환기시키며 일종의 ‘번역사회학’을 시도한다.
이상길이 소개하는 책들의 서지사항만 살펴보는 것으로도 흥미롭다.
“『권력과 지식』은 푸코의 철학적 여정을 잘 보여주는데, 이미 반세기 전에 나온 글들의 모음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현재성을 지니는 여러 주제─인민적 정의, 건강과 질병, 섹슈얼리티, 진실의 정치 등등─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172쪽)
푸코의 『권력과 지식』은 1977년 이탈리아에서 나온 편역서를 참조해 1980년 영미권에서 편집됐고 국내 번역은 1991년이었다.
“『시뮬라시옹』이 인터넷은 고사하고 IBM PC가 겨우 첫선을 보인 해(1981년)에 나온 저작이라는 사실은 지금도 놀라운 감이 있다.” (224쪽)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은 1992년 국내 번역됐다. 이 책의 ‘영화적 복제’라고도 할 만한 ‘매트릭스’(1999년)보다 그나마 빨리 번역된 것이 다행이라고 할 판인데, 참고로 이 책의 일본어 번역은 1984년에 나왔다. (심지어 한국에도 진출한 일본 생활잡화점 ‘무인양품(無印良品)’의 이름(‘브랜드/상표/표지’가 없어도 좋은 제품이란 의미)은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에서 착상한 것이다. 일본공산당 출신의 기업가가 제안한 ‘브랜드명’이다.)
이상길이 펼친 12권의 책들은 1980~1990년대 한국사회의 지적 풍경을 ‘읽은’ 책들이기도 하다. 서투르게(오역이 많았다는 의미) 번역됐어도 그 시대에 충격을 던져준 ‘외부’(서양)의 사유. 그러나 돌아보면, 지적 지체나 정체를 떠나, 우리가 딱 그 시기였기에 받아들인 그 책들은 그 시대에 우리가 부족했던/갈망했던 그 무엇인가를 ‘읽은’ 책들이다.
그래서 “책을 매개로 우리는 다른 시대,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도 진정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될 수 있다”(2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