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사진 뭉텅이를 찾았어요.”(봉준호 감독)
220*300mm라는 대형 사이즈의 328쪽짜리 책. 종이에 인쇄된 활자보다 디지털 이미지에 훨씬 익숙한 시대에, 언뜻 봐도 야심 찬 분량이다. 하지만 두께와 무게에 대한 긴장은 책을 여는 순간 금세 녹아버리고 만다. 반듯한 표지를 열면, 가장 먼저 박해일과 동료들이 함께 찍힌 다정하고 유쾌한 스냅사진들을 마주하게 된다. 고 장진영, 김상경, 문소리, 최민식, 송강호 배우 등의 모습도 함께 엿볼 수 있는 촬영 현장 비하인드컷 속엔 타는 듯한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는 박해일, 불 붙은 화염병을 주시하는 앳된 박해일, 장난스럽게 철로를 베고 누운 박해일의 모습이 있다. 오프닝뿐만 아니다. 책 곳곳에서 전도연, 배종옥, 탕웨이, 윤여정, 김고은, 공효진, 이나영, 신민아 등 박해일과 합을 맞춘 수많은 배우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반가운 모습을 비춘다.
박해일 배우의 아주 개인적인 사진들. 동시에 한국영화의 역사적 사진들. 오직 『배우 박해일』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며, 많은 영화인의 도움으로 이 한 권의 책에 담길 수 있었던 사진들이다. 예컨대 봉준호 감독은 “얼마 전 사진 뭉텅이를 찾았다”며 이 책을 위해 〈살인의 추억〉, 〈괴물〉 현장에서 포착된 박해일의 모습을 보내왔다. 이제는 영화의 현장에서 멀어진 많은 스틸 사진가들이 묻어두었던 오랜 필름에서 박해일의 순간을 찾아내어 보내주었다. 박해일 본인 또한 이 책을 위해 많은 사진을 제공해 주었고, 이 책의 원고를 읽은 후 더 기억났다는 듯 몇 장의 사진을 더 보내왔다고 한다. 작가인 백은하 소장 역시 한 장이라도 더 많은 사진을 수록하기 위해 수많은 배급사, 제작사와 오랜 시간 협의를 거쳐야 했다.
“진의를 왜곡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 제안에 응했습니다.” (배우 박해일)
“처음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저는 박해일을 이렇게 소개할 것 같아요.
여기는 박해일 씨인데요, 직업은 ‘거절’입니다.” (박찬욱 감독)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귀한 사진들이지만, 그것만으로 이 책의 가치와 재미를 설명하긴 한참 부족하다. 『배우 박해일』은 배우연구자 백은하가 지난 1년간 배우 박해일을 취재하고 탐구하여 완성한 책이다. 이 책을 쓴 백은하는 영화주간지 『씨네21』 취재기자로 시작해 웹매거진 『매거진t』, 『텐아시아』를 창간하고 편집장을 역임한 베테랑 영화 저널리스트다. 2004년 펴낸 첫 책 『우리시대 한국배우』 이래로 배우 박정민, 고아성, 안재홍, 전여빈, 변요한과 함께 한 책 ‘넥스트 액터 시리즈’, 배우 이병헌, 배두나와 함께 한 ‘액톨로지 시리즈’까지 꾸준히, 그리고 흔들림 없이 배우를 중심으로 한 책을 쓰고 만들고 있다. 스타, 영화의 얼굴, 혹은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배우를 표현하는 흔한 수식을 넘어서기 위해 분투하며 ‘배우’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영화라는 예술을 탐구해 온 독보적인 ‘배우연구자’다. 이러한 맥락에서 『배우 박해일』을 만든 1년이란 지난 25년 동안 각자의 트랙에서 서로의 행보를 응원하며 달려온 두 영화인이 ‘이해받는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집중적으로 대화하고 글로 옮긴 시간이기도 하다.
수많은 영화인들이 박해일 배우에 대한 자료와 기억을 아낌없이 나눠준 것도 오직 배우에 대한 각별한 애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결같이 영화와 배우의 동료이자 팬, 연구자, 무엇보다 전문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백은하 소장에 대한 믿음도 한몫했을 것이다. 자신의 기억과 노력, 영화라는 예술의 명과 암을 그저 지나가는 소문인 양 허투루 다루지 않을 거란 신뢰 말이다.
예술가, 장인, 기술자로서의 해부
브랜드, 스타, 아이콘으로서의 분석
동료, 시민 인간으로서의 증언…
배우를 연구하는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방법!
영화인들의 신뢰와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액톨로지 시리즈’는 단순한 선망 또는 호감만으로 ‘배우’에게 다가서지 않는다. 배우연구자 백은하에게 ‘액톨로지’라는 배우 연구는 연기, 캐릭터, 개성, 육체, 목소리, 이미지, 협업, 스타덤, 아이콘, 산업, 연구, 인류학 등이 혈관처럼 복잡하게 뻗어나가서 결국 ‘사람’이라는 근원으로 가 닿는 시도다. 이번 책에서 그는 ‘박해일’이라는 한 사람을 프리즘 삼아 영화와 연기에 대한 통찰력 있는 글쓰기를 선보인다.
이 책은 크게 6개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ANATOMY(해부)’에서는 박해일의 연기를 분석한다. 한국영화가 한 번도 본 적 없던 유형의 형사 ‘장해준’(〈헤어질 결심〉), 몸 상태가 노인과 흡사해질 정도로 몰입했던 ‘이적요’(〈은교〉), 대한민국 국가대표 용의자 ‘박현규’(〈살인의 추억〉) 등 박해일의 대표작 속 인물을 영화 저널리스트의 시선으로 뜯어보고, 그 캐릭터에 대한 해석과 기억을 배우의 입으로 직접 듣는다. 익숙한 영화 속 장면을 배우의 연기를 중심으로, 즉 ‘비트’ 단위로 쪼개어 스틸컷과 매치한 기획은 독자에게 영화를 감상하는 시야를 확장해 주는 경험을 선사한다. ‘ANALYSIS(분석)’은 배우의 ‘몸과 얼굴’을 중심에 놓는다. 최근 대표작 현장을 꾸준히 촬영한 전영욱 스틸 작가가 바라본 ‘박해일의 눈’, 20년을 그의 곁에서 옷을 입힌 정주연 스타일리스트가 지켜본 ‘박해일의 몸’, 한국영화의 얼굴들을 만져온 송종희 분장감독이 집중한 ‘박해일의 얼굴’ 등 배우의 외형을 책임져온 스태프들을 세심하게 취재했다.
“순수하고, 깔끔하고, 집요한 나의 해일에게” (배우 탕웨이)
“특이한 사람 중에서도 제일 특이한 사람” (아티스트 백현진)
친밀한 동료 영화인들의 입으로 직접 듣는 ‘사람 박해일’도 빼놓을 수 없다. ‘COLLABORATION(협업)’은 배우 탕웨이의 편지로 문을 연다. 〈헤어질 결심〉으로 합을 맞춘 탕웨이는 이 책을 위해 “순수하고, 깔끔하고, 집요한 나의 해일에게”라는 길고 아름다운 편지를 손수 써서 보내왔다. 연극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박근형은 박해일을 비롯한 가난하고 젊은 대학로 배우들과 함께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던 일화를 들려준다. 그와 함께 공연한 〈청춘예찬〉은 박해일을 임순례 감독에게로 이어준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함께 시작된 영화계의 러브콜은 그를 〈한산: 용의 출현〉의 김한민 감독, 〈헤어질 결심〉의 박찬욱 감독에게로 인도한다. 영화감독 임순례, 김한민, 박찬욱은 박해일과의 작업을 마치 현재 상영 중인 영화라도 되는 양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들에게 박해일은 무구하고 해맑은 소년, 한없이 숙고하는 사람, 흔들리지 않는 사람, 거절이 직업인 사람이다. 최근 〈파묘〉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배우 김고은은 현장의 누구에게도 큰소리 내지 않던 박해일이 오직 갓 데뷔한 신인 여배우인 자신을 지키기 위해 소리를 내주었던 장면과 그때 했던 귀한 다짐을 나눠준다. 전방위 아티스트이자 자타공인 ‘이상한 사람’ 백현진은 박해일을 이렇게 표현한다. “제가 살면서 특이한 사람을 많이 봤는데 해일이는 그중에서도 손꼽혀. 하여튼. 이상해”
‘액톨로지 시리즈’만의 특별한 탐구 생활!
목소리의 비밀을 집중 해부한 의학적 연구부터
소설가 정세랑, 시인 임유영,음악가 이랑, 작가 한정원의 문학적 연구,
박해일의 스토리텔러적 면모까지!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헤어질 결심〉에 빠져본 독자라면, 소위 ‘헤친자’라면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서래 앞에서 붕괴되어버린 형사 장해준의 목소리를 가슴의 울림으로 떠올릴 것이다. 액톨로지 시리즈의 팬이라면 앞서 발간된 『배우 배두나』에서 뇌파를 분석함으로써 배두나의 뛰어난 공감력을 ‘규명’했던 기획을 기억할 것이다. 이번 『배우 박해일』이 파고드는 키워드는 ‘박해일의 목소리’다. 이 기획에서 작가는 마이크가 포획해 낸 배우의 목소리를 가장 예민하게 파악해 내는 충무로 베테랑 임형근 동시녹음기사를 인터뷰한다. 박해일 배우의 음성으로 세상에 나온 영화 속 명대사는 물론 관객들의 사연을 다섯 시간 동안 낭독했다는 에피소드, 오디오 북, 다큐 내레이션과 전시 오디오 가이드 작업 등 ‘목소리’와 관련된 다채로운 이야기를 채집했다. 특히 흥미로운 기획은 예송 이비인후과/음성센터와 협업한 ‘목소리 연구’다. 박해일은 어떤 목소리를 가졌는지, 그의 음성을 수식하는 ‘안정적이고 믿음직한’, ‘부드럽고 다정한’ 등의 수식 어구를 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지를 실험해, 그 결과를 독자들에게 공개한다.
영화의 언어였던 ‘박해일’을 문학의 언어로 새로 지어 올린 챕터도 눈에 띈다. 영화에서, 뮤직비디오에서, 인터뷰에서 꾸준히 책과 연결되어 온 박해일을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받는 작가들이 각자만의 문학, 그리고 음악으로 표현한다. 『보건교사 안은영』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쓴 소설가 정세랑은 2063년이 배경인 단편 소설을 기고했다. 첫 시집 『오믈렛』으로 현재 가장 뜨거운 신인에 거론되는 시인 임유영은 물과 해양 생물, 그 곁에 고요히 존재하는 어떤 사람에 관한 시를 썼다. 뮤지션이자 영화감독인 ‘신의 놀이’의 이랑은 짧은 영화 같은 가사와 악보를, 맑고 기분 좋은 문장의 에세이 『시와 산책』의 한정원 작가는 ‘수많은 박해일’을 주연으로 쓴 희곡을 선사한다. 여기에 박해일이 직접 창작한 이야기도 실렸다. 슈퍼문이 뜬 밤에 들려주는 설화와 같은 이야기로, 제목은 ‘바다와 손님’이다. 그간 확인할 계기가 없던 그의 스토리텔러적 면모가 한 편의 즐거운 사건처럼 다가온다.
“형태 없음, 양식 없음, 유형 없음.
패턴이 없는 배우 박해일”에 관한
수상하도록 아름다운 도록, 투철하리만치 치밀한 도감!
『배우 박해일』의 백미인 ‘산책하는 인간, 박해일’은 박해일 배우가 그 어떤 매체와도 한 적 없는 기나긴 인터뷰다. 박해일 배우가 안내하는 길고 꾸준하지만 더없이 산뜻한 산책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긴 대화다. 때론 배우가 먼저 만남을 청하기도 하며 사계절에 걸쳐 이루어진 족히 120시간이 넘는 분량의 인터뷰다. 박해일의 어린 시절과 성장의 기억, 그가 온 마음을 다해 잘 해내고자 하는 영화, 그가 바라본 여러 동료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지만 꾸밈이 없다. 그 깨끗한 말들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어느새 배우라는 직업, 영화라는 예술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공명하는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박해일이 내내 고백하는, 사람을 향한 그의 흔들림 없는 존중을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
『배우 박해일』은 한치의 지루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작가의 투철한 취재와 성실한 문장은 때론 잡지처럼, 때론 에세이처럼, 때론 문학처럼 박해일이라는 우주로 독자를 안내한다. 나아가 박해일로의 산책이 좀 더 즐거울 수 있도록 기획자로서의 능력도 아낌없이 발휘한다. 견고한 내용에 걸맞은 아름다운 도서 디자인은 디자인 스튜디오 ‘워크룸’에서 맡았다. 표지 사진은 포토그래퍼 정멜멜이 맡아, 최고의 영화감독조차 ‘패턴을 알고 싶어’하는 박해일의 얼굴, 그 빛과 어둠의 모호한 경계를 포착했다. 책장이라는 박해일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에 활기찬 색감을 불어넣는 신연철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은 『배우 박해일』에 독자적인 시각적 재미를 부여한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곧 내 연기의 힘”이라고 박해일은 말한다. ‘거절이 직업’이라는 그가 선뜻 ‘액톨로지 시리즈’에 자신을 ‘원재료’로 내어준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의 근원 역시 ‘사람에 대한 호기심’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배우 박해일』을 펼쳐 드는 이 또한 동일한 호기심을 공유하는 독자일 것이다. 이렇게 배우 박해일은, ‘액톨로지 시리즈’는, 이 책을 펼쳐보는 독자는 ‘단일한 종족’이 된다.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던 ‘서래’와 ‘해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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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톨로지(Actorology) 시리즈
액톨로지 시리즈는 배우 이병헌을 시작으로 한국영화를 이끄는 위대한 배우들의 명단을 이어갑니다. 백은하 배우연구소가 제안하는 액톨로지는 예술가, 장인, 기술자로서의 해부, 브랜드, 스타, 아이콘으로서의 분석, 동료, 시민, 인간으로서의 증언을 통해 배우를 연구하는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방법을 모색합니다. 한 명 한 명, 배우의 초상들로 채워질 액톨로지 시리즈의 벽이 언젠가 한국영화 전체를 이해하는 통찰의 풍경이자 정밀한 지도가 되길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