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종이에 수없는 선을 잇는 날이 잔잔히 흐르고
색색의 물감이 묵묵한 그리움 담아 퍼져나갈 때
비로소 길 위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최민진 작가가 펴낸 《바람이 걸어온 자리》에는 그가 삶이라는 여행지에서 만난 풍경과 대자연, 시간의 속삭임이 담겨 있습니다. 작가는 낯선 여행자의 감각으로 일상의 소란과 고요를 포착해 단정한 글과 그림으로 담담히 표현해냅니다.
작가가 응시하는 세계는 언뜻 외롭고 적막해 보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텅 빈 고요는 여행자의 발 아래서 흩어져 어디론가 흘러가고, 해가 뜨고 바다가 밀려드는 거대한 자연의 질서가 다시 분주한 삶을 재촉합니다. 저문 시대의 기적이 울리는 붐비는 거리, 묵빛이 내려 흐르는 고즈넉한 산방, 비좁은 골목에서 마디마디 춤을 추는 마리오네트, 수풀 그늘에 한가로이 자리 잡은 악어, 갓 구운 빵이 나오길 기다리며 서로에게 인사하는 사람들, 침묵의 언어를 닮은 깊은 어둠, 오렌지와 파랑 파라솔이 꽉 들어찬 광장에 쏟아지는 햇빛, 갈매기가 소리 내어 우는 아침의 빈터……. 작가는 이처럼 고요한 자연과 수런거리는 삶이 하나 되는 장면을 간결하고 소박한 붓질로 그려냅니다.
작가가 오랜 기간 정성스레 빚고 담근 글과 그림에는 또한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습니다. 타자를 헤아리는 작고 소박한 마음은, 검푸르게 솟은 사이프러스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기도가 되었다가, 시끄러운 세상 떨치고 가만히 쉬어 가라며 마음의 언덕을 내어주는 키 낮은 돌담이 되었다가, 자유를 갈구하는 이들이 지친 몸을 의탁하는 든든한 뗏목이 되었다가, 큰물이 할퀴고 지나간 생채기를 더듬는 다정한 손길이 되었다가, 광장에 울려 퍼지는 구슬픈 아프리칸 리듬이 되어 우리를 위로합니다.
침묵은 단지 침묵만이 아니고, 길은 단지 길만인 것이 아닙니다. 최민진 작가가 그려낸 고요한 풍경은 단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묵직한 감동을 안겨줍니다. 작가는 밖으로 꺼내놓지 못한 수많은 언어를 가슴에 머금고 오늘도 길을 떠납니다. 길 너머 길 헤아리는 삶의 여정을 걷고 걸으며, 오늘의 길을 갑니다. 바라고 향하고 갈림길에서 엉키어 돌아서며, 보이지 않는 길을 에워 돌다 들어섭니다. 걸어온 길은 삶을 받아 안고 가만히 나아갑니다. 순간과 순간을 스치고 지나간 바람과 함께 삶이 그렇게 흘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