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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말테의 수기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
  • 열린책들
  • |
  • 2013-04-11 출간
  • |
  • 320페이지
  • |
  • ISBN 9788932912110
★★★★★ 평점(10/10) | 리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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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말테의 수기

역자 해설: 고독과 고난을 숙명처럼 짊어진 사람들에 대한 기록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연보

도서소개

『말테의 수기』는 릴케가 로댕을 방문한 당시 파리에서 받았던 인상을 「말테」라는 젊은 시인의 눈을 통해 그려낸 작품이다. 그는 완결된 형식과 줄거리를 포기하고, 이 작품을 메모와 산문시, 편지, 회상, 철학적 성찰 등 다양한 형식을 지닌 71개 기록의 몽타주로 엮어 냈다. 화려한 문명의 이면을 지배하는 고독과 죽음, 공포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 작품은 「수기(手技)」라는 새로운 형식과 산업 사회의 도시 문명을 비판하는 주제로 문단에 충격을 안기며 20세기 초 독일어로 발표된 최초의 현대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예컨대 나는 많은 얼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식해 본 적이 없다. 사람들도 많지만, 얼굴들은 더 많다. 누구나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얼굴을 몇 년씩이나 쓰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 얼굴은 써서 닳고, 더러워지고, 주름이 잡히고, 여행 중에 끼고 다닌 장갑처럼 늘어나기도 한다. 그들은 검소하고 단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얼굴을 바꿀 줄도 모르고, 씻을 줄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닌 얼굴이 충분히 좋다고 생각한다. 누가 그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반증해 보일 수 있을까? 이제 생기는 당연한 의문은 그들도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얼굴은 무엇에다 쓸까 하는 것이다. 다른 얼굴들은 잘 보관해 둔다. 자식들이 그것들을 쓰게 될 테니까. 그렇지만 그 사람들의 개들이 그것을 쓰고 나가는 일도 생긴다. 그러지 말란 법이 있는가? 얼굴은 얼굴일 뿐인데.
본문 10~11면

내가 직접 봤거나, 들어서 아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봐도 그것은 언제나 마찬가지다. 그들 모두 저 자신의 죽음을 지니고 있었다. 죽음을 마치 포로처럼 자신의 갑옷 안에 지니고 있던 남자들, 아주 늙어서 몸은 작아졌지만 무대처럼 엄청나게 큰 침대에 누워 온 가족과 하인들과 개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얌전히, 그러나 위엄 있게 저세상으로 떠난 여인들. 그리고 아이들, 아주 어린아이들까지도 예사로운 아이의 죽음이 아니라, 온 정신을 다해, 지난날의 그들이 지녔고 또한 미래의 그들이 품었을 법한 죽음을 맞이했다.
본문 21면

엄마가 내가 이런 사내아이가 아니라, 작은 계집아이이기를 바라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 기억 속에 떠올랐다. 나는 엄마의 그 소원을 어찌어찌 알아냈었다. 그래서 오후만 되면 때때로 엄마 방의 문을 두드릴 생각이 났던 것이다. 엄마가 누구냐고 물으면, 밖에서 「조피예요」라고 외치는 것이 행복했다. 그때 나는 조그만 내 목소리를 예쁘게 꾸미느라 목구멍 속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내가 (그때 입던 계집애의 실내복 차림으로, 팔소매를 썩 걷어 올린 채) 방 안에 들어서면 나는 그냥 조피였다. 엄마의 꼬마 조피는 소꿉놀이에 몰두했고, 못된 말테가 다시 돌아오더라도 혼동이 생기지 말라고 엄마는 조피의 머리를 따주었다. 말테가 돌아오는 것은 결코 원치 않았다. 그가 떠나 있는 것이 엄마나 조피에게는 편안했다. 그리고 (조피가 언제나 똑같이 높은 목소리로 이어 나간) 그들의 대화는 대개 말테의 못된 짓을 일일이 들춰내고 거기에 대해서 비난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아아, 그래, 이 말테란 놈은」 하고 엄마는 한숨을 쉬곤 했다. 그리고 조피는, 마치 사내아이를 여럿 알고 있기라도 하듯, 일반적인 사내아이들의 못된 짓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다.
본문 109면

사랑받는 사람들의 삶은 나쁘고 위험하다. 아아, 그들이 자신을 극복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사랑하는 사람의 주변은 안전하다. 아무도 그들을 수상히 여기지 않으며, 그들 자신은 배반할 능력이 없다. 그들에게서 비밀은 치유가 된다. 그들은 비밀을 밤꾀꼬리처럼 통째로 내지른다. 그 비밀은 나뉜 부분이 없다. 그들은 한 사람을 위해 하소연한다. 그러나 자연 전체가 그들과 동조한다. 그것은 하나의 영원한 존재를 위한 탄식이다. 그들은 잃어버린 사람을 뒤늦게 허둥지둥 따라간다. 그러나 벌써 첫걸음을 내딛자마자 그를 추월한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오직 신이 계실 뿐이다.
본문 2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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