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왜곡과 삶의 왜곡의 연속성을 단절하기
고대 이집트와 서남아시아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아울러 일컫는 오리엔트 문명은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역사나 문화적인 측면에서 매우 발달한 인류의 문명으로 손꼽힌다. 많은 인류학자는 다른 종들의 군집이 수용할 수 있는 최대 수가 한정되어 있는 것과 달리 인류는 그 한계가 없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인류의 핵심적인 특징으로서 종교를 가진다는 특성을 꼽는다. 즉, 종교가 생물학적 군집의 최대 수용량의 한계를 돌파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 신이 그 신을 섬기는 모든 사람 안에서 동질감을 통한 안정감을 부여할 뿐 아니라 그 신을 섬기는 종교 안에서 신을 섬기기 위한 율법과 규례가 그 자체로 한 공동체 내에서의 도덕과 법규들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형성된 군집은 공동체의 규범과 문화를 만들고, 그렇게 탄생한 문화는 다시 종교를 심화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인류 초기의 문명을 살피는 일 또한 필연적으로 종교에 대한 숙고가 뒤따른다.
저자는 특별히 종교에 대해 “인간의 자유를 향상시키고 사제들은 권력보다 인간을 섬겨야 한다”라고 말한다. 즉, 인간이 신 혹은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증은 역사적인 맥락에서의 종교를 살필 때 그 다각적인 의미와 면모를 지닌다. 가령 희생과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는 지극히 종교화되고 정치화되어 권위를 드높여 갔고 중세에 이르러서는 대중들 위에 군림하는 수단이 되었다. 눈을 돌려 이슬람의 일부 극단주의자들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꾸란의 전체적인 가르침보다는 일부의 구절을 들어 테러를 자행하기도 한다. 종교의 세속화와 권위화로 인한 왜곡은 개신교, 로마 가톨릭, 이슬람, 불교, 힌두교를 막론하고 역사의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종교의 본질이 결국 사람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역으로 인간을 억압한 역사적 사례들이 더 자주 눈에 띄게 된다는 것이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인가? 저자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단지 ‘현상적인’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인류의 최초의 문명과 그 종교로부터의 원인을 물어 가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인류 초기 문명의 종교인 수메르 신화로부터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영향을 받은 결과일 따름이다. 또한 기독교의 복음이 퇴락해 갈수록 인류의 근본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신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다는 메시지로 현세보다는 내세에 집중하게 한다는 부작용을 함께 지닌다. 그렇기에 종교가 인간의 삶을 더욱 가치롭고 풍요롭게 만들기보다는 종교와 함께 퇴락의 길을 걷게 한다고 분석한다. 저자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팔레스타인의 분쟁과 다툼의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 있는가를 분석하고 포착하는 것에 있다. 또한 한 번뿐인 삶을 죽음에 대한 존재적인 불안과 근심에서 벗어나 가치롭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