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육체노동을 하면서 자투리 시간에 써 내려간 메모는 일반사회와 격리됐던 정치범의 수용 실태에 관한 핵심 당사자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작지 않다.”
책에는 저자가 간첩으로 조작되기 전 이야기부터 감옥에서 겪은 희로애락까지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리영희, 박현채, 김지하, 신영복, 서승 등과 옥중에서 만난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특히, 대전교도소 서화반에서 만난 신영복과의 일화에 이 책의 제목이 된 ‘장동’이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들어 있다.
대전 서화반에서는 여러 명이 생활하는데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어 일 보기도 바빴다. 어느 날 내가 화장실에 가려고 하자 신영복 선생님이 웃으면서 “이철은 장똥이니까 나를 먼저 보내 줘. 난 단똥이라 시간도 안 걸린다”라고 하셨다.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 “단똥 선생이 먼저!”, “장똥 선생은 나중에” 하며 장난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서예 작품을 제작하는데 호가 필요하게 되었다. 나는 생각하기가 귀찮기도 하고 또 ‘장똥’이라는 어감도 그리 나쁘지 않아서 긴 동쪽 나라(일본은 동쪽의 긴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에서 ‘길 장 자, 동녘 동 자’, ‘장동’을 나의 호로 쓰기로 했다. 서화반 사람들은 나의 그런 호를 놀려 웃기도 하였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 옛날 요순시대 순임금이 ‘동방에서 왔다(즉 조선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듯 나도 기다란 동쪽에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를 나타냈다. 그래서 내 서예 작품에는 장동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고 또 이 책도 ‘장동일지’라고 제목을 붙였다.
_ 234쪽
그 밖에도 책에는 처우 개선을 요구하다 무자비하게 구타를 당하고 감옥 안의 감옥인 ‘징벌방’, ‘폐쇄 독방’에 수용됐던 옥중투쟁이 상세히 묘사돼 있다. 특히 저자가 대구교도소 수감 시절 주도한 단식투쟁인 ‘대구 7·31 사건’은 당시 좌익수들이 가혹한 폭행과 진압을 뚫고 승리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한편, 그가 이처럼 힘든 생활과 투쟁을 견디게끔 힘을 보탠 것은 약혼자 민향숙과 그녀의 어머니 조만조 씨의 활약이었다. 그들은 국내 운동권 인사들은 물론 일본인들과 연대해 이철을 비롯한 재일동포 정치범들의 석방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석방된 이철과 함께 이후에도 노력과 투쟁을 이어갔고, 그 결실이 대통령의 사과와 이 책 《장동일지》의 출간이다.
이제 나에게는 더 이상 여한이 없다. 돌이켜 보면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려 길고 고된 징역살이를 스스로에게 되물으며 살아왔다.
긴 세월을 견뎌 낼 수 있었던 까닭은 언제나 민향숙과 조만조 어머니라는 마음의 동반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힘든 시절을 서로 격려하며 2인 3각이 아닌 3인 4각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많은 동지와 훌륭한 구원 운동 친구들이 단단하고도 강하게 받쳐 주어서 고마웠다. 이렇게 은혜로운 인생이 또 어디 있겠는가.
(중략)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서른여섯 명이 무죄판결 받는 데서 끝날 것이 아니라, 재일동포 정치범 마지막 한 사람까지 무죄를 받아 내는 일과 진정한 민주주의가 조국에서 실현되고 남북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 시대가 도래했음을 먼저 가신 분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라도, 아직 죽을 수는 없다.
_ 3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