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동이 트기 직전, 어둠을 걷은 지조의 시인
조지훈 선생은 특출한 시인이고 저명한 대학교수였다. 교과서에 실려있던 〈승무僧舞〉를 비롯하여 〈고풍의상〉, 〈봉황수〉, 〈낙화〉, 〈바위송〉 등 한국 시문학사에 고딕체로 기록되는 다수의 시를 짓고, 민족운동사와 국학 관련의 글을 썼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들어가 사전 편찬사업을 하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수많은 문인·지식인들이 친일로 훼절을 할 때 청년 조지훈은 오대산으로 들어가 청절한 지조를 지켜냈다. 그래서 〈지조론〉을 쓸 수 있는 지식인이 되었다.
수없는 절창을 쓴 그는 시인만이 아니었다. 《한국민족운동사》, 《한국문화사서설》, 《한국학연구》등의 다양한 학문적 업적과 사상계편집위원, 자유당정권 말기에는 민권수호국민총연맹 중앙위원, 공명선거 전국위원회 중앙위원으로 반독재투쟁의 선두에 섰다. 4.19혁명의 정신적 지주의 한 사람이었던 조지훈 선생은 4월혁명이 성공한 뒤 《고대신문》 1면에 독재와 싸우다 희생된 제자들에게 바치는 헌시를 썼다.
이제까지 조지훈 선생에 관한 많은 연구 논문과 저술이 주로 문학분야에 집중되고 있는데, 그는 실상 시인이면서 학자이고 논객으로 활동한 복합적인 지식인이었다. 한말의 논객 매천 황현과 일제강점기의 논객 단재 신채호, 그리고 만해 한용운의 불타정신을 잇는 당대의 일류논객이었고 풍류 지성인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비판하여 한때 ‘정치교수’로 몰리기도 했으나, 그는 결코 정파의 울타리에 갇히지 않았다. 그래서 독재정권을 비판하면서 〈우국의 서〉를 쓰고, 기백을 잃은 청년들에게 〈큰일 위해 죽음을 공부하라〉고 갈파하고, 지식인들의 나약성과 훼절행위를 엄중히 비판하였다. ‘큰일 위해’의 글에서는 “내가 죽음을 공부하라는 것은 군중 속에 휩싸여서 군중과 함께 여러 사람에 쌓여서 죽는 공부가 아니라 혼자서라도 죽을 공부를 하라는 말이다”고 심오한 충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조지훈 선생은 풍류문인과 학자, 논객으로 호방하게 살다가 48세의 짧은 생애를 접었다. 민주와 공화 그리고 정의 대신 ‘법치’ 만이 나부끼는 다시 암울한 이 시대, 지성을 갉아먹는 지식인들이 소 갈 데 말 갈 데 가리지 않고, 권력이 부르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교수·언론인이 줄을 서는 이 시대에, 그리고 추하게 빛바래지는 시인·문인들이 넘치는 시절에, 이 책은 조지훈 선생과 같은 기개 있는 지식인을 기대하면서 짧지만 깊고 넓었던 삶과 사유의 족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