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말로 다합니까.” 어떤 기억은 자신의 말을 넘어설 수가 없다. 어떤 기억은 온 몸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저 참혹했던 4·3을 살았던 누군가에게 그 고통으로 감겨진 기억은 여전히 현재다. 그러니까 이루 말할 수 없는 날들의 이면에 조금은 닿을듯도 하다.
4·3의 겨울이 또 다시 거세게 우리에게 왔고, 우린 이제 그 말들을 서둘러 정리해야 했다. 기억이란 것은 이미 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일어설 줄 모르다가, 어느 날 부활하기도 한다. 이번 작업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처음 뱉어냈던 말들이 모든 것이 아니고, 그 밖의 것들을 들어주고 질문하는 자에 의해 또 기어이 살아나기도 한다는 것을.
제주4·3연구소는 4·3이 꽉 억눌려 숨조차 쉬기 어렵던 시절부터 4·3을 살아낸 사람들의 4·3을 기록해왔다. 《4·3과 여성》 시리즈를 시작한 지 어느새 5년이 흘렀다. 이 세월 동안 4·3으로 뒤엉킨 개인사를 살아내야 했던 여성들을 기록했다. 이들 가운데 세상을 떠난 분들도 우리는 마주한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기록으로 남게 됐다. 흩어진 기억들은 촘촘히 재생하고 기록되면서 비로소 역사적 생명력을 얻는다. 이것은 처음 이 시리즈를 기획하고 낸 첫 번째 책 《4·3과 여성-살아낸 날들의 기록》을 세상에 내보내면서부터 확신하게 했다.
묻혀졌던 4·3속 여성들의 일상, 생활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4·3의 진실규명 과정과도 같은 선상에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책이 갖는 의미와 성과를 돌아본다면 파급력은 출발보다 컸다고 볼 수 있다. 4·3 진실규명의 토대가 되었던 1차 자료가 증언에 있다는 것을 볼 때 그것은 설득력을 갖는다.
무엇보다 이 구술집은 최초로 영문판 번역의 기회를 얻었다. 이로인해 해외의 연구자들과 4·3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닿을 수 있었다. 이 증언을 텍스트로한 논문이 발표되는 등 일련의 성과도 낼 수 있었다. 4·3을 살아낸 여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국제적으로 내보냈다는 것은 비로소 4·3 소통의 길이 열렸다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번에 또다른 중요한 부분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가 들여다봐야했다. 이 다섯권 째 책에 대해서다.
우리는 이번 공동 작업의 방향을 4권까지 담아내지 못했던, 비어있는 지역들에 대해 눈을 돌리기로 했다. 제주도 전 지역 여성들의 ‘4·3과 생활사’를 채워넣어야 4·3속 삶의 형태를 총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채록 대상자들은 제주읍 9명, 조천면 5명, 구좌면 4명, 남원면 1명, 안덕면 2명, 대정면 3명, 애월면 1명 등이었다. 4·3의 전체상을 조망하고 차후 연구를 위해서도 지역의 균형은 중요했다. 때문에 이번 책의 채록 대상자는 서귀면, 중문면, 한림면, 성산면, 표선면으로 한정하기로 했다. 물론 그만큼 대상자 선정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서술은 여전히 예전 기조를 이어 가기로 했다. 날 것의 제주어를 그대로 남기고 싶었으나 그것은 일차 자료로 남겨두고, 대중성 가독성을 위해 거의 표준어로 갔음을 밝혀둔다.
너무나 압도하는 삶의 이야기들로 쌓여진 세월들이다. 온전히 그들의 4·3과 그들의 생활사를 담아낸다는 것은 여전히 조심스럽고 어렵다. 혹여 빠진 대목이 있을 것이기에 짚고 또 짚었다. 그럼에도 미진함은 남을 것이다.
봄이 올 것이다. 봄의 힘을 빌어 아마도 이 책이 작은 위로가 되기를. 그 혹독한 4·3의 기억으로 육신과 정신이 아프고 고통스런 세월을 살아낸 이들이여, 그럼에도 그 이상의 삶을 일궈낸 이 아름다운 여섯의 어머니여, “결국은 아픈 대지 위에도 끝내는 살아서 파릇파릇 꽃을 피워낸다는 것입니다.” 말하고 싶다. (발간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