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에는 성별이 없다”
- 여성의 권리를 옹호한 최초의 자유주의 사상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기념비적 저서 《여성의 권리 옹호》(1792)를 써서 여성의 자유와 권리를 외친 근대 최초의 페미니스트이다. 조지 엘리엇, 에마 골드먼, 버지니아 울프 등 후대 작가와 정치사상가 들은 울스턴크래프트의 삶과 사상에 깊은 영감을 받았고, 미국 여권 운동의 선봉자인 엘리자베스 스탠튼과 수전 B. 앤서니는 울스턴크래프트를 여성이 참정권을 얻는 데 공헌한 첫 번째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중시한 계몽주의적 가치관이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하지만 여성은 인간의 범주에 들 수 없었다.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취급받지 못했고 정치적 권리는커녕 경제적 권리도 행사할 수 없었다. 당대 가장 진보적인 계몽주의 사상가였던 장자크 루소조차 “여성 교육은 항상 남성과 관련되어야 하며 … 남성의 삶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여성의 의무”라고 말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루소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고 그를 존경했지만, 루소가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러한 시대에 《여성의 권리 옹호》를 써서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독자적 존재이며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있음을 최초로 주장한 사상가가 바로 울스턴크래프트였다. 《여성의 권리 옹호》는 18세기 영국 사회의 악폐를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 여성을 구원할 해결책을 제시하는 미래 세대를 위한 혁명적인 선언문이었다.
자유의 위대한 옹호자가 여성의 자유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아이러니를 메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메리는 루소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겠다고 결심했다. … 여성의 유일한 의무가 남성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신성 모독이며, 그런 의견은 성경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신은 여성을 “남성의 장난감, 남성의 딸랑이가 되도록” 창조하지 않았다. 게다가 영혼에는 성별이 없으므로 남성 ‘그리고’ 여성은 모두 미덕을 쌓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234쪽
“11월의 어느 음산한 밤에 나는 완성된 내 남자를 바라보았다”
- 열여덟 소녀는 어떻게 현대적 괴물 ‘프랑켄슈타인’을 탄생시켰나
메리 셸리의 대표작 《프랑켄슈타인》(1818)은 어느 과학자의 실험으로 탄생한 괴물의 기이한 외형 뒤에 가려진, 괴물보다 더 끔찍한 인간의 욕망과 광기를 파헤친 걸작이다.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 메리 셸리는 불과 열여덟 살이었다. 그 전까지 소설을 써본 적이 없던 나이 어린 문학 견습생이 어떻게 인간 본성의 복잡한 심연을 탐구한 작품 《프랑켄슈타인》을 쓸 수 있었을까?
메리 셸리의 아버지이자 진보적인 정치철학자였던 윌리엄 고드윈은 딸에게 글을 쓰는 것이 그녀가 부모에게 받은 유산이라고 가르쳤다. 당대 가장 급진적인 자유주의 사상가이자 계몽주의 철학자였던 부모에게 받은 유산은 메리 셸리의 정신과 문학적 감수성을 형성했다.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에 자전적인 요소를 담아내면서 부모와 가깝게 연결되고자 했다.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에 사로잡힌 메리는 가급적 원고를 쓰는 일에 전념했다. 재주가 뛰어난 남성 벗들에게 주눅이 들기는커녕 작가가 됨으로써 자신이 물려받은 문학적 유산에 부응한다는 생각에서 용기를 얻었다. - 262쪽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주제는 그녀의 삶에서 결코 멀리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신을 낳다 죽었고, 자신이 어머니가 되었을 때는 자식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또한 메리 셸리는 퍼시 비시 셸리와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여 아버지에게 거부당했고 사회적으로 비난받았다. 메리 셸리는 아버지에게 외면당하고 상처받은 자신의 내면을 탐구했고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렇게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들어낸 ‘괴물’이 창조자로부터 소외되면서 겪은 좌절과 고통을 탐구함으로써 인간 본성의 복잡한 심연을 파헤쳤다. 메리 셸리가 작품 속에 깊이 있게 풀어낸 생명의 창조, 진정한 인간의 자격, 고통과 소외 같은 주제는 현대인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프랑켄슈타인》이 소설,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재생산되며 세기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불멸의 고전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메리는 아버지의 애정을 되찾으려는 또 다른 노력으로 《프랑켄슈타인》을 아버지에게 헌정했다. 하지만 이 책은 어머니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기도 했다. 메리는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면 고드윈이 딸을 버렸듯이, 프랑켄슈타인이 자기 피조물을 버렸듯이 자신과의 관계를 끊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메리는 프랑켄슈타인이 아들을 배척한 결과를 자세히 묘사하면서 자신의 슬픔과 분노를 소설에 쏟아부었다. - 284, 285쪽
“위안을 준 것은 남편이 아니라 글쓰기였다”
- 여성과 글쓰기
여성이 공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았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메리 셸리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저자는 글쓰기가 두 여성에게 생계유지의 수단이자 인습을 타파하고 자기만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무기였다고 강조한다. 두 메리는 글쓰기를 통해 고난이 닥칠 때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많은 여성을 대변하고 있다고 느꼈다.
《스웨덴에서 쓴 편지》, 내면과 자아 탐구의 기록
권위를 과시하려고 격식을 차린 글을 발표했던 당대 남성 작가들과 달리, 울스턴크래프트는 관례를 깨부수고 독창적인 언어와 문체로 자기 생각과 감정을 표현했다. 일종의 여행기인 《스웨덴에서 쓴 편지》(1796)는 이러한 문학 실험의 결실이었다. 이 책은 감성과 철학, 개인적 경험과 정치적 견해를 독창적으로 혼합한 울스턴크래프트의 글쓰기 방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내적인 삶을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선언한 최초의 영국 작가였다. 울스턴크래프트의 혁명적 글쓰기는 이후에 나올 여행기 장르를 뒤바꿔놓았고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퍼시 비시 셸리, 로버트 사우디 등 낭만주의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마음은 실제 ‘존재’를 창조할 수 있고 ‘감정’은 ‘착상을 낳을’ 수 있으며 영감은 자아의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논리가 아니라 감정에서 나오고 … 이것은 낭만주의의 중요한 신조이고, 메리는 관례적으로 영국의 첫 번째 낭만주의 선언문으로 간주되는 워즈워스의 유명한 《서정 가요집》 서문보다 6년 먼저 낭만주의의 신조를 명료하게 표현했다. 사실상 《스웨덴에서 쓴 편지》는 감정과 주관성과 심리적 복합성을 ‘옹호한’ 책이었고, 낭만주의자들에게 새로운 글쓰기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 447쪽
자기 구원을 위한 글쓰기, 여성 해방을 위한 글쓰기
메리 셸리에게 글쓰기는 자기 성찰과 자기 치유를 위한 여정이었다. 아이 넷을 낳고 키우는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유산을 하고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도, 남편과 아이 셋을 먼저 떠나보낸 고통을 겪으면서도 글을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메리 셸리는 “오로지 책과 문학적 일거리를 통해서 고통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어머니 울스턴크래프트는 메리 셸리가 글을 쓸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어머니의 사상을 폄하하고 흠집 내려는 사람들에 맞섰고, 모든 여성이 독자적으로 살아갈 때 생기는 이점을 옹호했다. 1835년에 출간한 소설 《로도어》는 이런 의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로도어》의 세계에는 영웅이 없다. 남성 인물들이 너무 나약해서 여성들은 서로를 위험에서 구하고 스스로 행복을 찾아야 했다. 메리가 여주인공의 이름을 패니라고 지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패니는 메리가 자기 언니에게 원했던 인생을 살고 있었다. 패니는 스스로를 교육하고, 친구들을 돕고 그들에게 조언하며, 사회를 개혁하려고 노력하면서 울스턴크래프트의 원칙-여성에게 자유를 주어라, 그러면 세상은 모든 이들에게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다-을 구현한다. … 《로도어》를 집필하는 작업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작품을 끝냈을 때 상처는 치유되었다. - 650, 6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