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시 「일류미네이션」
“궁극”이라는 말은 표현 가능성의 한계 지점에 있다는 뜻이다. 「일류미네이션」은 언어와 소통, 담론과 유희, 말과 침묵이 구분되지 않는 곳에 위치한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 했던 그의 시는 해석이 거의 불가능하다. 출판된 지 백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일류미네이션」은 시간과 공간의 굴레에서 벗어난 꿈의 기록이다. 현실의 삶과 인식의 관습을 바탕으로 읽을 때 작품의 의미는 혼란 그 자체다. 실재와 환상, 의식과 무의식, 사물과 허상의 여러 차원이 하나의 화면에 혼재하기 때문이다. 「일류미네이션」은 인간에게 던져진 커다란 물음표다. 그 시들 속에는 존재의 의미와 세상의 모순에 대한 성찰이 다양한 의문의 형태로, 온갖 방향으로 제시되어 있다. 세상의 본질을 가장 간결하고 강렬한 방식으로 표현한 시집 「일류미네이션」. 「일류미네이션」알면 세상의 모든 시를 이해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모든 의미로”
난해한 랭보의 시를 대하는 관점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 속에서 천재의 메시지를 읽어 내려는 진지한 시선, 다른 하나는 그것을 결국 성마른 아이의 글 놀이로 치부하는 태도다. 랭보를 오래 연구한 비평가들도 둘 사이를 오간다. 진지한 담론이든 악동의 유희든 랭보의 텍스트는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문 같다. 합리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대목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보다 더 많다. 논리적 이해의 결핍은 그러나 독자의 폭넓은 상상력을 촉구하는 요인이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의 모호한 표현들에 대해 의미를 묻는 어머니에게 “문자 그대로, 모든 의미로(방향으로)” 읽으라고 했다는 랭보의 대답은 시사적이다.
복합적인 언어의 의미 파악에 집착하면 “상징들의 숲” 속에서 길을 잃기 쉽다. 랭보의 상징은 일반적 문학의 범위를 벗어난다. 극히 개인적인 상징에서 간단한 알레고리에 이르기까지 편차가 크다. 상징 하나하나를 풀이하는 것보다 상상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것이 낫다.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쫓다 보면 이해의 폭은 차츰 넓어진다. 그것이 랭보가 찾았던 “영혼에서 영혼으로 향하는” “보편적 언어”(le langage universel)의 소통 방식이 아닐까.
시의 본질이 함축이라면 「일류미네이션」은 그 궁극
아르튀르 랭보 연구로 학위를 받은 뒤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해 온 저자는 “미지”의 글쓰기를 추구한 결과인 「일류미네이션」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굳이 자연스럽게 풀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한계가 뚜렷한 번역을 반추하도록 프랑스어 원문을 함께 실었고 프랑스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 영어 번역을 부가했다. 또한 독자들이 미지의 영역, 상징들의 숲을 헤매다 영영 길을 잃지 않도록 각 시마다 조심스럽게 해설을 실었다. 시의 본질이 함축이라면 「일류미네이션」은 그 궁극이다. 무한한 침묵의 빈 공간을 메우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무구하고 무한한 세상과 진정한 삶의 구현
랭보의 문학적 실존은 짧지만 그가 남긴 작품의 울림은 여전하다. 문학의 본질과 가능성에 대한 깊은 의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글로 “삶을 변화시키기”가 가능한지, 내면의 “여러 다른 삶”과 꿈의 기록이 새로운 세상을 제시할 수 있는지에 대한 탐색이 그의 글쓰기를 이끈다. 삶의 결은 거칠었지만 그의 작품은 “흠 없는 영혼”을 추구했다. 무구하고 무한한 세상과 “진정한 삶”의 구현이 그의 지향점이다.